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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9)내 안의 다른 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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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인 라파엘(가명)은 갑자기 누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고 언제든지 공격할 것만 같다며 불안과 공포를 호소했다. 당장 입시를 앞둔 상황이기에 이러다 시험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더더욱 불안했다. 보통 이런 경우 상담을 청하는 내담자는 불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방법을 묻는다. 하지만 라파엘은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신부님, 제가 느끼는 이 불안과 공포는 제가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병에 걸려서 생겨나는 것인지가 궁금해요.” 불안의 원인이나 그 발생 과정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통해 라파엘이 망상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피해망상이나 관계망상 환자는 스스로 병에 걸렸다는 의식, 즉 병식(病識)을 얻기가 어려운데, 라파엘은 자신의 증상을 객관화하거나 대상화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 증상을 자신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병에 걸려 생겨난 것인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물어보았다. 라파엘은 자신이 병에 걸려 불안하다면 안심이지만, 만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좀 더 대화를 나눠보면서 나는 라파엘이 머지않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성적일 뿐 아니라 친구가 전혀 없는 라파엘에게 군대는 무척이나 두렵고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군대에 가서 발생할 일에 대한 불안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지금은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해 죽을 판이었다.

라파엘은 군대에 가지 않을 방법이 있는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입대를 앞둔 청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공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연히도 자신을 누가 감시하고 공격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겨난 시기가 바로 군대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맞닿아 있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연관성이 느껴졌다.

라파엘은 마음이 여리고 선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심리적 여성성이 높고 사회적 내향성이 높으며 자아 강도가 약했다. 라파엘에게 군대는 한껏 남성호르몬에 물이 오른 수컷들이 치열하게 몸을 부딪치며 생존해 나가는 전쟁터였다. 선천적으로 남과 경쟁하고 갈등하는 것을 싫어하는 라파엘은 군대에 가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마치 투견 판에 끌려나가는 겁에 질린 애완견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어느새 군대에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굳어졌다. 이런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되자, 라파엘의 뇌는 참으로 충성스럽게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무의식적 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를 받고 있으며 최종으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실제로 엄습하였던 것이다. 울고 싶을 때 누가 뺨을 때려주는 기분이랄까? 실제로 심장이 빨리 뛰고 가슴이 답답하며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뭔지 모를 안정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런 공황증상이 계속될 경우 정신적 문제로 군대를 면제받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감에서 오는 묘한 안정감이었다.

라파엘은 그러나 자신의 양심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학생이었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이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을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만일 스스로 병을 만들어 군대에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겁함을 넘어 죄를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정신적으로 병이 생긴 것이라면 군대를 면제받을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죄의식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다소 불순한 의도(군대 가고 싶지 않은 생각)로 만들어낸 불안처럼 보여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정신증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사실도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라파엘은 자신의 정신 상태가 궁금했다. 정신 감정을 통해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계속>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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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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