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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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너 어디에서 깨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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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만군의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 80,20) 새벽에 깨어나니 때 아닌 폭우가 쏟아지고 회오리바람 소리마저 들립니다. 무서워라! 블루베리 농사를 지으면서 기후에 민감해졌습니다. 올해 이상기후와 생태계 파괴로 밭에 송충이 떼가 몰려들어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내년 빈곤 국가 식량위기와 기근 소식도 들립니다. 요즘 주변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정말 걱정됩니다.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수님 지혜를 청합니다.


■ 복음의 맥락

본문은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 종말 설교(마르 13,5-37) 마지막 단락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37절 말씀이 예수님 설교 전체를 요약합니다. 이것은 수난 전에 예수님이 모든 이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 고별사(13-17)와 마찬가지로 마르코에 따른 예수님 영적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 집을 향해 떠나는 예수님이 남아 있는 제자들 나아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분이 다시 올 때까지 어떤 태도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재림을 앞두고 희망을 유지하며 현재 임무에 충실하라고 합니다. 전례력으로 새해 시작과 성탄 준비 여정에 적절한 초대말씀입니다.


■ 깨어 있어라

복음은 “깨어 있어라”에 대해 두 가지를 가르칩니다.

첫째, 왜 깨어 있어야 하는가?(마르 13,33)를 소개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마지막 때만이 아니라 모든 시간, 모든 기회와 상황,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동체가 종말이 언제인지 조바심을 내지 않고 하느님의 때와 섭리에 의탁하며 매순간 그분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자세 자체가 이미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 분에 대한 신뢰, 오고 계신 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사실 주님은 항상 살아 계신 분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묵시 1,17-18)

둘째, 깨어 있는 방식에 대해 가르칩니다. 모든 믿는 이는 일상에서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나아가 ‘주인의 집’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신약에서 ‘집’(오이코스)은 건물, 가정, 나아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집주인이 종에게 자기 권한(힘)을 주면서 집을 맡기고 떠난다는 것은 마르코 시대에 예수님 승천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집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 모습과 방식은 다르지만 동등하게 그분 집의 종입니다. 종의 역할은 주인이 부재할 때 자기 일에 몰두하지 않고 주인의 집을 돌보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문지기는 집주인과 집의 다른 종들에게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주인이 오면 문을 열어주고 약탈자나 강도한테서 주인 집을 보호하며, 다른 종들에게는 주인 도착을 알려 주인을 합당하게 맞도록 준비시킵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령의 성전이라고 불리니 우리는 자기 마음과 삶을 잘 지켜야 하는 문지기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 굳어진 마음과 잠드는 것

우리가 성실한 문지기가 되는 것을 막는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첫째, 제1독서에서 말한 대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이사 63,17) 세월이 흐르면서 부르심의 첫 순간을 잊어버리고 시스템 안에서 체념하고 포기하며 마음은 돌처럼 굳어져 갑니다. 굳어진 마음은 예수님 신비와 진리에 마음을 여는 대신에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다시 평가하거나 새로운 통찰력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둘째 위험은 잠드는 것입니다. 수난 전에 예수님 입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은 계속 제자들에게 눈을 뜨고 있으라고 가르쳤지만 제자들은 예수님 수난 현장에서도 깊이 잠들어 버립니다. 잠든다는 것은 주변과의 접촉을 서서히 상실하는 것,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외부 자극에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의식이 서서히 잠들게 하는 유혹은 도처에 많습니다. 거짓 뉴스와 정보, 과대광고, 행복과 번영, 성공을 약속하는 세상적 가치. 잠든다는 것은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다고 여기면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존재인지 깨닫지 못합니다.(묵시 3,17)

또 잠든다는 것은 자기 은사와 은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코린토 공동체가 처음에 얼마나 은총과 은사가 충만한 공동체인지,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바치는 공동체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코린토 전서 뒷내용은 개인이나 집단이 은사의 기원과 목적을 잊어버려 공동체 안에 파당과 분열이 형성된 것에 대해 바오로가 어떻게 신자들을 가르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은사는 장식이나 자랑이 아니라 임무이자 책임입니다.


■ 대림 시기에 깨어 있기

깨어 있다는 것은 인내와 노력, 수고가 필요한 훈련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그림자 같은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말, 침묵과 무언의 질문에 깨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서도 깨어 있습니다. 우리 공동 가정인 지구, 특히 하느님의 나약한 창조물, 물과 공기에 깨어 있습니다. 또 자기 마음과 살아가는 현실의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섬세하게 깨어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자세로 주님을 맞는 문지기는 행복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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