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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영성 이야기] (30) 터널을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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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월 24일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인 데다 한겨울이었으니 누구든 삶이 힘겨워 고통에 민감했을 것이다. 어느 신부님께서 24세의 끼아라 루빅에게 예수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우셨던 순간은 겟세마니에서보다는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신 순간이었으리라고 하셨다.

신부님의 그 말씀이 이 포콜라레 영성의 창시자에게 각인된 것은, 장차 ‘일치의 영성’이 움틀 전조였을 것이다. 채찍질과 못 박힘의 육신적 고통에다 모욕과 수치심이 주는 정신적 고통에 더하여,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벽했던 일치가 한순간에 무너짐을 느끼고 부르짖으셨으니, 그 영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찾을 수는 없을 터이므로. 그때부터 끼아라는 ‘버림받으신 예수님’이라는 이름으로 그분의 고통을 기억하며 사랑해 드리고자 하였고, 이는 일치를 되살리는 비결이 되었다.

내게 찾아온 시련도 참으로 버거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많이 잊었겠지만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시기에 사업 실패로 겪은 고통은 내 생애에 가장 큰 것이었다. 이전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었고, 나름대로 이웃에게 작으나마 베풀 수 있는 입장이어서 계속해서 그렇게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사업이 그 혼란기의 막차에 오르는 길일 줄이야. 생애 최대의 고비 앞에서 내 삶은 온통 ‘버림받은 예수’가 되고 말았다. 까마득한 나락으로 추락하여 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걸어야 했다. 사막이고 광야였다. 그러니 그분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어찌하여?”라고 호소하다가, 예전부터 들어온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되었다.

느리지만 시간은 흘러갔고, 깊은 통찰이 시작되었다. 그런 시련이 없었다면 하느님께 그렇게 바짝 다가갈 일이 있었을까? 조금은 철이 들어가는 듯했다. 인간이란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또한 그분께서 허락하셨다면 우리의 허물도 결국 선용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아 갔다. 터널에는 끝이 있기 마련, 어둠 속을 걷는 내게도 손 내미는 이웃들을 보내 주셨고, 텅 빈 성당에서도 감실 안에는 늘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지나고 보니 나의 그 체험이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끼아라는 크든 작든 우리의 모든 고통에 이름을 지어 불러 보자고 하였다. 피로라는 버림받으신 예수님, 실패라는 버림받으신 예수님, 무더위, 미움, 게으름, 억울함, 오해, 굴욕 등등. 그래서 그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해 드리자고 하였다.

우리의 고통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느라 받아들이신 그분의 버림받으심에 비하면 너무도 하잘것없으므로, 그것을 그분의 고통의 바다에 던져 넣고 다시 사랑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때 우리 주위에 일치가 건설된다고 하였다. 삶이란 어떤 형태든 고통을 동반하게 되어 있으니, 그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합쳐 드릴 때 우리의 멍에는 가벼워지고 우리의 작은 마음으로도 감히 그분을 사랑해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

종일 비가 내린다. 오늘은 산책을 할 수 없는 날이다. 무력감이라는 버림받으신 예수님이시다. 나는 이분도 사랑해 드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노트북을 열고 밀린 원고를 다듬기 시작한다. 사랑하고자 쓰는 글이니 누군가에게 또 사랑으로 가 닿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터널 속을 걷는 이가 있다면, 터널의 끝은 바깥이라고, 밖은 환하다고 들려주고 싶다.




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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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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