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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아는 만큼 보인다] 96. 지옥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3~103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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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누가 가는 곳일까요? 주님께서 하신 천국으로의 초대를 “스스로 거부한”(1033) 이들이 갑니다. 누가 천국의 행복을 ‘스스로’ 거부하고 영원한 고통의 불붙는 지옥을 선택하겠느냐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시며, 자유로운 인간을 원하십니다.”(2847)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회개로 초대하시지만 결코 이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160)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지옥의 고통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길 가다가 열병에 쓰러진 십 대 소년 마이클을 삼십 대의 한나가 구해 정성껏 간호해 줍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합니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면 한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립니다. 한나는 마이클의 장래를 생각해서 조용히 마이클을 떠납니다.

그로부터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전범 재판을 참관하던 중 옛 연인 한나가 전범으로 몰려 재판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녀의 혐의는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의 일상을 기록해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마이클은 문맹인 한나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순순히 유죄를 인정하고 20년 형을 받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미워하면 고통스럽고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다 사랑만 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을 받더라도 미움을 선택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나의 자존심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자존심과 자아가 강해지면 이렇듯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행복인지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아를 행복하게 하려고 실제로 지옥의 고통도 감수합니다. 육체의 행복을 위해 영혼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만약 이렇게 무엇이 행복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살다가는 가리옷 유다처럼 되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지만,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지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분인데 어떻게 인간이 그런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십니다.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1037)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칩니다.”(1035) “그곳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됩니다.”(1034) 천국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한 행복을 누리는 곳이라면, 지옥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1035)입니다.

만일 지옥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거나,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결국엔 다 구원해 주실 것이라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지옥도 없는데 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구원이 필요하겠습니까? 만약 사람이 불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음을 희망한다면 아무도 불 속에 있는 사람을 구하러 뛰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불 속에 머물면 죽는 줄 아니까 목숨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것입니다. 지옥의 존재를 믿기에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2베드 3,9) 바라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있기에 나를 구하신 주님을 찬미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천국을 향한 선택과 지옥을 향한 선택으로 나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 선택의 자유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인간은 어디든 원하는 곳을 향해 ‘스스로’ 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단언과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하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1036)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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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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