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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영성 이야기] (54) 빈손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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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라 하시고, 노아에게는 무지개를 걸어 약속의 표징으로 삼으셨다는 구약을 보면 이런 상징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한몫을 한 듯하다. 예수님께서도 눈먼 이를 말씀만으로 고칠 수 있으셨을 텐데도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니, 인간은 오감을 활용할 때 더욱 분명하고 쉽게 인식하기 때문인 것 같다.

포콜라레운동 초창기부터 이 영성에서도 이런 상징이 등장했으니, 바로 무지개 색깔이다. 무지개색을 어떤 나라에서는 아홉 가지로, 혹은 세 가지로 표현하는 곳이 있다고도 하지만, 보편적으로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으로 본다. 그래서 끼아라 루빅도 이 일곱 가지 색으로 우리 삶을 구분해 보자고 하였다.

예를 들어 빨강은 재산의 공유 및 경제와 노동, 주황은 이상의 전파와 사도직, 노랑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기도 등을 말한다. 이렇게 일곱 가지 측면으로 나의 삶을 점검하다 보면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를 빨리 찾아낼 수 있어서 참 좋다. 우리의 일상이 조화롭지 못하다면, 전교는 잘하는데 가정은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든지, 기도는 많이 하지만 외골수라 불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무지개색에 내 삶을 비춰 보기로 했다.

무지개색의 선두에 있는 빨강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직업과 노동에 대한 성실, 공정한 경제, ‘주는 문화’ 등을 포함한다.

사업이 곤두박질쳐서 내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때였다. 사실 사업을 벌인 까닭도 경제력이 좀 더 생기면 다른 이를 많이 도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긴 했지만, 요즘처럼 우리나라 전체에 경제적 한파가 몰아쳤을 때라 그 시절에 사업으로 성공하리라는 기대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때였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으니 지혜롭지 못했고…, 아무튼 바닥을 쳤다.

그렇지만 이 영성의 삶을 접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를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정돈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빨간색을 살 것인가? 우선 내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데 무엇으로 나눔을 실천할 것인가? 그래서 함께 영성을 사는 분에게 나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분은 내게, 빈손을 내줄 줄 아는 것도 나눔이라고 하였다.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 상황이 되니 정말 쉽지 않았다. 그것은 빈손뿐 아니라 나의 자존심까지 내놓아야 하는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형제들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수첩을 마련해서 제일 앞 장에 ‘가난한 형제를 위하여!’, ‘포콜라레운동을 위하여!’, ‘나의 정돈된 삶을 위하여!’라고 기록했다. 어느 날은 사과가 들어오기도 하였고, 또 다른 날은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여비가 도착하기도 하였다. 그때부터 도움이 올 때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을 모았다. 그렇게 나의 대차 대조표를 기록하여 보니 얼마나 많은 선물이 도착하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바닥을 칠 기회를 허락하신 것도 어쩌면 그런 색다른 대차 대조표를 작성해야 함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남들이 보기에는 빈털터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위해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존재였다. 기쁨이 돌아왔다. 아주 깊숙한 어둠 속에서도 빛줄기가 솟아났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자 주위도 안정을 찾아갔고, 이웃을 돕는 방법이 꼭 물질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어 주고, 존중해 주고, 나의 경험을 나누어 주고, 함께 울어 주거나 기뻐해 주고, 글을 써 주고….

이렇게 내 빈손은 ‘하느님의 섭리’를 통해 아름다운 빨간색, ‘주는 문화’를 기억하게 되었다.




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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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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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받쳐 주시는 분이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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