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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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기자의 엄마일기] (12)서툴러서 더 아름다운, 아이의 첫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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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기 내 이름이 쓰여 있는데? 맞지? 저 글씨 김지성 맞지?”

동네를 걷는데 6살 지성이가 한 식당의 간판을 가리킨다. 김지성이 쓰여 있다는 말에 간판을 올려다보았는데 간판에 쓰여 있는 글자는 ‘ㅇㅇㅇ감자탕’이었다.

“엄마는 모르겠는데, 어떤 게 김지성이야?”

“다시 봐봐, 내 이름이랑 비슷하잖아.”

다시 간판을 들여다봤는데 눈이 감자탕에서 멈췄다. 감자탕에는 김지성을 쓸 때 필요한 자음이 하나씩 들어가 있었다. ㄱㅈㅇ이 차례로. 귀엽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했다.

얼마 전, 유치원에 가져가야 할 숙제가 있었다. 우분투 쪽지다. 우분투(Ubuntu)는 남아프리카 반투어에 속하는 말인데,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이란다. 아이가 가정에서 선행을 실천할 때마다 그 내용을 쪽지에 적어서 용돈과 함께 보낸다. 유치원에서 그 선행으로 받은 용돈을 모아 해외의 어려운 친구에게 보내는 프로그램이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우분투 쪽지에는 지성이가 동생과 간식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잠들기 전 장난감 정리를 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유치원에 우분투 쪽지를 가져가라고 하니 안 가져간단다. 영문을 물었다. 우분투 쪽지를 가져가면 아이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데 글씨를 읽을 수 없으니 발표하기가 싫었던 거다.

“반 친구 중에 글씨를 읽는 친구가 있어? 누가 발표했는데?”

“응~ 연서랑 유빈이랑….”

유치원 엄마들 단톡방에 질문을 띄웠다. 한글을 잘 읽는 친구를 칭찬해주는 건 좋은데,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한 아이들에게 스스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 격려와 칭찬은 아니었는지 궁금했다. 다른 친구들은 우분투 쪽지를 어떻게 적어가는지를 물었다. 한글을 뗀 아이도 있었고, 한글은 모르는데 발표하고 싶은 아이를 위해 그림으로 그려준다는 엄마도 있었다.

“지성아, 유치원에서 우분투 발표하는 친구들, 그림 보고 설명한 거래. 글씨를 읽는 친구도 있지만, 엄마가 그려준 그림을 보고 설명한 거래.”

“그림을 그린 거래?” 아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더니 그럼 유치원에 쪽지를 가져가겠단다.

이제 겨우 이름 석 자를 쓰는 지성이는 ‘방귀’를 어떻게 쓰냐고 물었다. 하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크게 방귀라고 써주니 웃기다며 깔깔댄다. 써보고 싶은 친구들 이름을 하나씩 말한다. 천천히 한 글자씩 써주자, 연필을 오른손과 왼손으로 옮겨가며 한 자씩 따라 쓴다. 순서는 뒤죽박죽. 자음과 모음을 완성해가는 아이의 첫 한글이 때 묻지 않고 아름다웠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텃밭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작물에만 마음을 두는 게 아니란 걸 느낀다. 꺾인 가지는 없는지, 아픈 가지는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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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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