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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4) 부모의 자애, 자식의 효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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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키우셨네. / 쓰다듬어 기르시고 키우고 가르치셨네. / 거듭 살피시고 드나들며 안아주셨네. / 이 은혜 갚고자 하나 하늘처럼 그지없어라.’(「시경」 〈소아〉)


어떤 이들은 이 대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버지가 어떻게 나를 낳았단 말인가. 요즘처럼 아버지는 돈이나 벌어오는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봉건질서 속에서의 가부장적 관념도 큰 문제였지만, 지금처럼 아버지가 가정을 이끌어가는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생명의 씨앗을 전해주었다. 그 정자는 난자와 결합하여 비로소 새로운 생명체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 생명체를 열 달간 뱃속에서 키운 뒤, 출산하여 젖을 먹여 키웠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자식을 낳았고, 어머니가 자식을 키웠다는 말이 그르지 않다.

지금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 꼽으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들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평생 추구해온 재산과 지위와 명예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공수래공수거를 실감한다. 그만큼 생명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이 귀하고 소중하다. 그러므로 목숨 바쳐 어떤 일을 하였다는 것은 위대하다는 뜻과 통하게 된다. 목숨 바쳐 자신의 소임을 다한 순직,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순국, 목숨 바쳐 궁극적 존재를 증거한 순교가 거룩하고 장엄한 까닭이다.

부부의 가장 큰 축복은 바로 그들의 분신과도 같은 자녀의 출생일 것이다. 부부가 나눈 사랑의 결실로서 태어난 생명이기 때문이다. 가정에 이보다 더 큰 경사가 또 어디 있을까. 남편과 아내로 시작한 가정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족으로 확대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예전에는 영아 생존율이 지극히 낮아 출산과 함께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다. 이에 따라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시에 새 생명의 창성을 기원하는 탄생의례가 신중하고도 엄숙하게 치러졌다.

우리의 전통적인 탄생의례는 금줄을 대문에 거는 방식이었다. 남아가 태어나면 새끼줄에 숯과 고추를, 여아가 태어나면 숯과 솔가지와 흰 종이를 꿰서 문 앞에 걸었다. 그렇게 삼칠일간 걸어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이는 곧 갓난아기를 일정 기간 동안 일정 장소에 격리시키는 행위였다. 불완전한 아이가 온전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의례였던 것이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벽사진경(?邪進慶)의 의미이자 상서롭지 않은 것을 물리치고자 하는 불제불상(?除不祥)의 바람이었다. 삼칠일은 사람이 되고자 한 곰이 동굴에 들어가 웅녀로 변신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신화의 후래적 관습은 갓난아이가 사람으로 인정받는, 비로소 살았다고 한숨 돌리는 시간이었다. 오늘날 과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면역력이 약한 갓난아기를 외부의 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격리조치이기도 하였다.

또한 금줄은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을 온 마을에 선포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새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금줄을 건 집안에서는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을 온 마을에 알려 자랑하고, 그 금줄을 본 이웃은 새 생명의 탄생을 부러워하고 축하해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축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중 자애하는 한편, 생명의 고귀함을 깨우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탄생의례가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이는 반면, 가장 높은 낙태율을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까지 시행되었던 산아제한정책은 새 생명의 출생을 도외시하거나 경원시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그러다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당국은 역으로 산아촉진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급급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독려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새 생명을 축복하는 한편, 온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의례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톨릭 가정에서 유아세례를 주는 것이 그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 기반에 생명의 고귀함과 인간의 존엄함이 전제된 생명의 문화를 펼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물질적 논리의 대박이 아니라 정신적 논리의 다복(多福)을 꿈꾸어야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자식이 많은 것을 다복하다고 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속 깊은 마음과 성경의 말씀이 다르지 않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과 강단에서 고전문학과 구비문학을 연구해왔으며, 중국선교답사기인 「둥베이는 말한다」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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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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