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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칼럼] (41) 설악산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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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이야기다. 지하철은 물론 이른 새벽에 다니는 버스도 드물던 때다. 서울에서 설악산에 가려면 하루 전에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여관에서 자고 이른 아침 첫차를 타서, 먼지가 뽀얗게 날리는 비포장 길을 따라 터덜거리며 달려 오후가 돼서야 설악산에 닿곤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차를 타고 가야 했기에 자리를 차지하려고 길게 줄을 서곤 했다.

사람 대신 커다란 배낭들도 길게 줄지어 놓여 있었다. 배낭 속에는 등산 장비도 가득했다. 무거운 석유 버너와 자고 나면 옷에 허옇게 털이 묻어나는 닭털 침낭이면 최고로 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배낭 속 짐은 더욱 어깨가 쳐지도록 무겁고 컸다.

모든 것이 어렵던 때였지만, 푼푼이 마련한 돈으로 등산 계획을 세우고 여러 날 등산에 필요한 장비와 먹거리를 준비했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더듬던 산길과 봉우리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마음속에는 설악산이 가득했다.

이맘때면 길 따라 줄지어 선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스쳐 지나가는 강원도 산골은 아련한 연둣빛으로 덮여 가는 산에 점점이 박힌 벚꽃으로 봄 기운이 넘쳐났다. 산줄기를 깎고 자르며 지나가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산골짜기 따라 작은 다리를 건너고 산줄기를 돌아 굽이굽이 이어지던 길이었다.

요즈음 넉넉한 마음으로 느리게 갔던 설악산이 가슴속에 점점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두 시간쯤이면 설악산에 닿는데도, 사람들은 더디다고 여기는 듯하다. 좁은 길을 넓게 만들고 골짜기로 이어지던 길은 곧고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 산줄기를 자른다. 커다란 다리가 하늘에 걸리고 직선으로 뻗어 가는 고속도로 하나로는 모자라 고속철도를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듯싶다.

그러한 길에 들어서면 오직 달리고픈 마음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빠름의 길이다. 집을 나서면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오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고속도로가 뚫리고 산과 바다는 지방 소도시에서도 고층 아파트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조차 아쉬워서 오래도록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에 담는 것으로 끝이다. 마음은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모든 것이 바쁘고 빠르게 이어지는 삶 속에서 잃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무관심하다.

빠름, 느림보다 더 느린 빠름이라는 말처럼 삶 속에서 우리들이 애써 찾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뒤돌아 본다. 느린 삶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바꾸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지만 이것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면 선뜻 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이것이 아이들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일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박그림(아우구스티노)
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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