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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과정, 축제처럼 즐기고 싶어요"

간암 투병하다 성탄 앞두고 세상 떠난 이성규(야고보) 다큐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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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반드시 절망 혹은 비관적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죽음이 축제가 되게 도와주세요."
이성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 독자들에게 쓴 성탄카드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지혜 기자
 
 "허락된 시간이 그런대로 충분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네요. 내가 살아갈 하루의 숫자가 줄어든 기분. 아직은 훌쩍훌쩍 울곤 합니다만,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두려운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과정일 겁니다. 죽음의 과정이 내게 축제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는 축제 현장에서 놀고 있어요. 재미나게 놀고 싶어요"(12월 3일 페이스북).

 12년간 인도 콜카타 거리에서 맨발로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을 그린 다큐영화 `오래된 인력거`를 연출한 이성규(야고보, 50, 대구 계산동본당)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간암 4기로 죽음에 직면하자 강원도 춘천의 한 호스피병동으로 떠난 이후 투병기를 페이스북에 올려 애잔한 감동을 전하던 그가 성탄을 열흘 남짓 앞둔 13일 세상을 떠났다. 아시아와 유럽 65개 나라를 누비며 뎅기열, 말라리아, 열대성 급성 이질에 걸려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긴 그가 다시 현장으로 향하지 못하고 발이 묶인 지 6개월여 만에 하느님 품에 안겼다.

 이 감독에게 간암이 찾아온 것은 올해 6월, 오랫동안 꿈꿨던 인도에서 촬영 중 수행자의 면도기를 빌려 면도를 했는데, B형 간염에 걸린 것이다. 서울 연세세브란스병원의 담당의사는 의학적 치료는 손을 놔야겠다고 했고, 그는 11월 말 짐을 싸 강원도 춘천의 한적한 호스피스 병동으로 홀연히 떠났다. 그가 통보받은 남은 시간은 3개월.  

 그는 병상에서 투병기를 써 내려갔다.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기록했다. 죽음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공허함과 소유, 상실, 가족과의 이별에 관한 단상들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죽음이 들어온 자신의 일상을 공유했다. 죽음이라는 축제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 이성규 감독이 평화신문 독자들에게 보내는 성탄카드를 쓰고 있다.
 

 성탄을 앞둔 5일 강원대학교병원 호스피스 병원에서 만난 이 감독은 두 손으로 힘없이 침대를 짚고,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했다. 그의 앙상한 손목에는 나무 묵주팔찌가 끼워져 있고, 병상에는 십자고상과 함께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삶의 마지막에 마주치는 10가지 질문」 등의 책이 놓여 있었다.

 "처음 저는 의사 말을 잘못 알아듣고, 남은 시간이 10일인 줄 알았어요. 3개월이라고 들었을 때 울었습니다. 행복했어요. 정리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이 감독은 말을 이었다.

 "내가 죽어가는 과정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사랑할 시간이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이니까요. 죽음의 과정을 축제처럼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감독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에서 분노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하느님, 하루를 허락해주셔셔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해요. 그런데 돌아서면 금방 눈물이 쏟아져요. 화장실에 혼자 있을 때 주먹으로 벽을 치기도 하고…."

 이 감독은 "죽음이 두려운 건 사실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며 "죽음을 인정하면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 병원 복도에서는 이 감독의 어린 두 딸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그는 "하모니카를 부는 저런 딸들을 더는 못 보는구나 생각하면 돌아서서 운다"면서도 "그러나 집착하면 내 삶이 더 힘들어지고, 죽음을 맞는 과정이 비참해진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인간에게 제일 힘든 것은 잊히는 것"이라며 "페이스북에 글을 쓰는 건 내가 잊히지 않는다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3개월 전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했다. 그동안 다큐 현장을 누비느라 신앙생활을 소홀히 했다.

 그에게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을 묻자, "좀더 사랑하지 못한 것과 수도자가 되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다. 예수회 지원자이기도 했던 그는 "노동현장에서 노동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죽음이 임박하고 보니 살아오면서 하루라는 일상을 너무 무시했다는 후회가 든다"고 말했다.

 "배낭을 들고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일상의 영역보다 비일상의 영역에서 행복을 더 많이 느낀 것 같아요. 지금은 일상이라는 시간을 쓰고 싶어도 못 쓰죠."

 곧 성탄이 다가온다고 하자, 그는 "성탄은 우리에게 가장 낮게 오신 분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감독도 예수님처럼 낮은 곳으로 천착해야 한다면서. 이 감독은 "죽음이 마침내 나를 찾아와 하느님을 뵙게 된다면, `감사합니다. 그동안 잘 놀다 왔다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12일 병자성사를 받고, 이튿날 새벽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성탄을 맞았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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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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