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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36.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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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12월 28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서 1차로 파견한 선교사들이 서울에 도착했다. 독일을 떠난 지 51일 만이었다. 한국 교회사에서는 `첫 남자수도회 파견`으로 기록된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인 12월 11일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신청한 원장좌 자치수도원 설립을 승인했다.

 교회 규정에 따르면, 원장좌 자치 수도원이 되기 위해서는 성대서원(종신서원)을 한 성직수사가 최소한 8명이 있어야 했지만, 포교성성에선 이를 특별히 관면해 줬다. 성 베네딕도회 총연합은 이에 그해 12월 15일 서울에 원장좌 자치 수도원을 설립한다는 문서를 공식 교부했다.

 이 그림은 북쪽에서 바라본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수도원 전경이다. 왼쪽이 혜화문이고, 성벽과 이어진 오른쪽 언덕에 수도원 본관이 세워져 있다.

 1397년(태조 5년)에 한양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쌓을 때 도성 북동쪽에 세워진 혜화문은 처음엔 홍화문으로 명명했다가 나중에 혜화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조 말에 중수했다가 1930년 일제가 시가지를 확장하면서 헐었다. 그 뒤 1970년대에 서울 성곽 복원공사가 이뤄지면서 일제에 의해 헐린 지 62년 만인 1992년에 복원됐다. 보통은 `동소문`이라고 불렀는데, 그림을 보면 당시 혜화문과 현재의 혜화문이 다소 다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성벽에 잇닿아 있는 듯한 수도원 본관은 길이 40m, 너비 10m의 3층 건물로 지었으며, 임시 수도원 건물과 이어져 있었다. 임시 수도원 건물은 일부는 수도원성당으로 개조했고, 일부는 숭공학교 학생들의 숙소로도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임시 수도원 건물 전체를 성당으로 썼다. 소목과 대목은 일데폰소 플뢰칭거 수사가 맡았고, 미장은 중국인 기술자들이 맡았다. 1911년 9월에 수도 공동체는 신축한 본관으로 이사했고, 봉헌식은 그해 12월에 거행됐다.

 혜화문과 백동수도원이 잘 어우러져 무척 아름답다. 1927년 11월 수도원이 서울에서 덕원으로 이전하면서 백동수도원 자리에는 서울대교구 대신학교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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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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