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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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품성구와 나]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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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1코린 13,7)
 
 군 복무를 마치고 대신학교에 복학한 후 맞이한 첫 여름방학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해 여름, 방학도 신학교 생활의 연장이라는 교구 사제 양성 방침에 따라 소속 본당에서 생활하게 됐다.
 
 당시 본당 신부님은 미국 명문 하버드대 출신으로 본당에 사무실을 둔 신용협동조합의 비리를 감지하고 그 수습 책임을 내게 맡겼다. 그러나 신협 비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본당 신부님의 큰 오해를 받아 눈 밖에 나게 됐다. 그 후 맞이한 방학은 신부님의 냉대로 본당에서 설 자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소의 위기와 갈등으로 인생 여정에 가장 험난한 산 등 하나를 넘어야 하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 큰 역경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놓으신 은총의 선물이었다. 인근 진천본당 신부님이셨던 사랑이 가득한 성스러운 분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이셨던 신부님께서는 내 성소 위기와 고통을 아시고 소속 본당 신부님이 이동될 때까지 매 방학을 진천본당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숙식을 제공해 주셨다.
 
 이것은 성소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없이는 내리기 어려운 용단이었다. 신부님은 들꽃 한 송이, 살아 있는 미물 하나, 그리고 사람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거룩한 분이셨다. 신부님은 한겨울 눈이 많이 내린 날이면 사제관 뒤편으로 가셔서 잔디밭에 쌓인 눈을 쓸고 참새들을 위한 먹이를 잔뜩 뿌려주곤 하셨다.
 신부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된 사제 상을 찾았고, 신부님과 닮은 사제가 되기 위해 수품 성구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1코린 13,7)를 선택했다. 사제 수품을 앞둔 어느 날, 그 신부님이 고맙게도 일생 동안 미사를 거행할 작은 성작과 성반을 손수 마련해 선물로 주셨다.
 
 사랑은 내어주는 것이다. 교구장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개인용 저금통장이 없었고 주머니의 지갑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내 전 재산이었다. 이상하게도 지갑은 한 번도 비어 본 적이 없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꼭 필요한 사람이 있어 모든 것을 주고 나면, 어김없이 그만큼의 돈을 누군가가 와서 채워주곤 했다.
 
 그동안 이 지갑을 통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왔다 나갔는지 하느님만이 아신다. 이 지갑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망과 용기를 얻었는지도 하느님만이 아신다. 비록 낡고 헐어버린 볼품없는 지갑이지만 이 지갑은 `기적의 지갑`이다.
 
 내게는 두 개의 거울이 있다. 하나는 성소를 지켜준 신부님이 선물한 성작이고 또 하나는 손때 묻은 낡은 지갑이다. 매일 아침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예수님을 너무나 닮은 신부님을 기억하고 신부님을 본받으려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 종종 책상에 모셔둔 낡은 지갑을 보며, 사제 수품 성구를 선택했던 사제 생활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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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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