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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신앙살이] (535) 지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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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본원에서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언제부턴가 젊은 수사님들이 토요일이나 주일, 점심 식사 이후 한가한 시간이 되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원로 수사님들과 공동방에서 장기 두고 있었습니다. 원로 수사님과 젊은 수사님이 조금은 큰 소리로 ‘장이야, 멍이야’ 하면서 장기를 두면, 그 옆에서 훈수를 두는 또 다른 젊은 수사님들은 원로 수사님을 위해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원로 수사님이 장기를 두다가 ‘장이야’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면, 주변의 젊은 수사님들은 신이 난 듯 상대편 젊은 수사님에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

“수사님, 장이래요, 장군 받아요.”

그런 다음 젊은 수사님들은 원로 수사님의 얼굴을 보거나 어깨를 안마해 드립니다. 그렇게 젊은 수사님들이 흥을 돋우며 말하면 장기 판 분위기가 한층 고조됩니다. 그러면 평소에 말씀이 없던 원로 수사님도 얼굴엔 함박웃음이 가득해집니다. 그리고 상대편의 젊은 수사님이 절절 매는 모습을 하면, 실제로 ‘껄껄’ 웃기도 하십니다. 심지어, 젊은 수사님이 장기의 수를 못 찾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원로 수사님은 더 신난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그럼 옆에 있던 젊은 수사님들은

“우와, 완전히 졌네, 졌어. 외통수야, 외통수. 수사님은 계속 연패네, 연패”

또 그렇게 바람을 잡으면 젊은 수사님은 연신 머리만 긁고, 그날의 공동방은 행복 가득한 웃음판이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원로 수사님과 주로 장기를 두던 젊은 수사님들 몇 명이 공동방에 모여 차를 마시며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자, 슬그머니 공동방 문을 열고 들어가 형제들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다 모여 있으니, 무슨 중요한 회의를 하나봐.”

그러자 그 중에 한 형제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예, 맞아요. 이제 막 회의 중이었어요.”

“그래? 아이쿠. 미안, 미안. 내가 나갈게. 그런데 무슨 회의를 하기에 아침부터! 혹시 우리 수도원의 백팔 장미단 같은 무슨 사조직 회의를 하는 거야? 하하하.”

이에 또 다른 유기서원자 수사님이 말했습니다.

“헤헤헤. 맞아요. 우리는 수도회 본원 소속 사조직이고, 중요한 모임을 하고 있었어요.”

‘에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수도원에 사조직이라니.’ ‘설마’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진짜로 무슨 사조직 모임에 회의 중이야? 정말”

그러자 모임의 맏형 되는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사조직은 무슨. 그냥 수도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젊은 형제들끼리 어른 수사님들을 공경하자는 마음에, ‘어른 공경팀’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저희들 각자가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어른 수사님들과 함께 어른 수사님들이 좋아하시는 것을 하기로 약속했어요. 그 중에 하나가 장기를 좋아하시는 수사님과 장기 두는 거예요. 아무리 어른 수사님이지만, 장기를 이기면 아이처럼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회의 아닌 회의를 하는 건, 어떻게 하면 어른 수사님들과 장기를 둘 때에 자연스럽게, 기분 좋게, 티가 안 나게 져 드릴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하는 중이었어요.”

세상에! 형제들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요. ‘지는 것이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우리 형제들이 그러한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니 나 또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날따라 우리 형제들이 더욱 고마웠고, 혼자 사는 우리네 삶, 그냥 ‘재미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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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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