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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침묵] 순명의 잔을 들고

김소일(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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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일(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스승이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심더니 말했다. “날마다 한 동이씩 물을 주어라.” 그곳은 사막이었다. 샘은 너무 멀리 있었다. 제자는 저녁에 물 길으러 가서 새벽에야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3년이 흐르자 나무가 싹을 틔웠다. 곧 열매도 달렸다. 스승이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 순종의 열매를 맛보게나.”

순종은 아름다운 미덕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진 복음적 권고다. 구원의 은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가슴 깊이 품어야 한다. 성덕을 지향하는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다. 만해 한용운은 복종을 예찬한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 /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순종은 쉽지 않다. 내 생각과 의지에 반하는 경우가 많다. 때론 나의 존재 의미마저 무너트려야 한다. 순종할만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순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복음적 순종은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결정에 기꺼이 순명하는 것이다. 불복의 마음마저 지우고 담백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순종의 대상은 대부분 나약하고 흠결이 많은 인간이다. 오해와 편견, 무지와 욕망 같은 인간적 약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질문했다. “당신에게라면 백번 죽어도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저 부족한 형제의 불합리한 결정에 꼭 순명해야 합니까?”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런 답변을 남겼다. “입회한 지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어느 수련자가 나의 원장이 된다면, 나는 그에게 노인이나 아주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여 복종하듯 그렇게 순종할 것입니다. 순명하는 형제는 장상 안에서 인간을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순종은 어리석은 굴종이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분과 만나는 신비의 길이다.

순종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언어로 승복이 있다. 순종이 종교적 복음적 가치라면 승복은 세상과 현실의 언어다. 아름다운 승복은 순종만큼이나 진한 감동을 준다. 심판의 오심이나 편파 판정으로 금메달을 빼앗긴 선수가 웃음으로 손을 내밀어 승자를 축하한다. 그는 눈앞의 승리를 놓쳤지만, 인류 전체에 훨씬 더 고귀한 메달을 바쳤다.

미국의 정치라고 늘 좋은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간혹 부러운 장면을 보여준다. 2000년 선거에서 앨 고어 후보는 54만여 표를 이기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개표 부정 시비가 있었지만 깨끗이 승복했다. 그리고 역사에 남을 명연설을 남겼다. “미국인의 단합과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연방대법원의 결정을 수용한다. 당파심이 애국심을 앞설 수는 없다. 조지 부시 후보를 중심으로 뭉칠 것을 호소한다.”

지난해 선거에서는 표차가 더 컸다. 클린턴이 트럼프보다 286만 표를 더 얻었다. 문제가 많은 선거였고 후유증이 이어졌다. 클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느끼는 절망감을 나도 느낀다. 고통스럽다.” 그러면서도 승복을 강조했다. “우리는 트럼프에게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나라를 이끌 기회를 줘야 한다.” 정치의 감동은 이런 것이다.

사순의 한복판을 지나며 하늘을 우러른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 순명의 잔을 들고 머뭇거리는 그대여, 기꺼이 죽어야 한다. 죽음 이후에야 부활도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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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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