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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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이 땅에 빛을] (6) 기득권을 버려라 - 양반 성인들

가진 것 다 버리고 오로지 신앙에만 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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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헌 성인이 체포되어 곤장을 맞는 모습(탁희성 작).
 
 
▲ 회장으로 임명된 후 교우들이 성사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공소로 제공했다가 체포된 남명혁 성인(탁희성 작).
 
 
▲ 신유박해때 경상도 단성(현 경남 산청군)으로 유배돼 30여 년간 머슴살이를 했던 남이관 성인(탁희성 작).
 
▨ 이광헌(李光獻) 일가 4인

이광헌 일가 “세상에서 가장 중한 것이 종교”

모진 박해에도 열성적 신앙 드러내

▲ 이광헌은 경기도 광주 이씨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다. 하지만 서른에 천주교를 알게 되어 부인 권희, 동생 이광렬과 함께 입교한 이후로는 방황을 깊게 뉘우치고 새 삶을 살았다. 세례를 받은 후에 가족과 함께 박해를 피하여 여러 차례 피신을 다니면서 가산을 모두 써 버렸기에 나중에는 거처할 집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교우들이 추렴하여 서소문 밖 고마창골이라는 곳에 기와집 한 채를 사 주어 그들 가족을 머물게 하고, 그 집을 공소로 사용했으며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양반이라는 신분에서 당장 끼니를 해결하기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음에도, 그는 천주님을 위해 이 세상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라며 담담히 교우들을 이끌었다.

1839년 4월 한밤 중에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어린 자녀 등 일가족 모두가 체포된 상황에서도 “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제 종교이니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교는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라 당당히 신앙을 고백, 1839년 5월 서소문 밖에서 53세의 나이에 참수형을 당한다.

▲ 권희(權喜)는 이광헌의 처로 결혼 후 23세에 남편과 함께 입교했다. 주교와 신부를 보필하고 쉬는 신자 회두와 외교인 권면에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남편을 보조하며 편안한 생활을 모두 버렸고, 교우들을 인도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남편과 함께 체포된 후 수많은 형벌을 이겨냈고, 어린 자식들이 곤장을 맞고 목마름,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광헌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남편 순교 후 4개월 동안 모진 형벌을 더 받다가 서소문 밖에서 46세 나이로 치명했다.

▲ 이 아가타는 이광헌과 권희의 딸로, 신심이 지극한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는 등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성장했다.

17세 때 부모와 함께 체포됐다. 형벌과 감언이설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이 아가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간수가 “네 부모는 이미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너도 그 뒤를 따르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부모가 배반을 했거나 안 했거나 그것은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저는 늘 섬겨온 천주를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라며 믿음을 지켰다.

어린 나이에 옥중에서 아홉 달 이상을 굶주림과 추위와 싸우며 태형·곤장을 이겨냈으며, 간수들의 힘 앞에서도 정결을 지켜냈다. 1840년 1월 서울 포청 안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이광렬(李光烈)은 이광헌의 동생으로, 이광헌의 입교를 계기로 천주를 따르게 됐다.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교우들에게 강직하고 열성적인 성품을 인정받았기에, 북경으로 가는 사신들과 동행하여 그곳에서 북경의 신부들로부터 세례와 함께 기타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수년간 북경을 왕래하면서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중책을 수행했다. 성사를 받은 후에는 더욱 강한 신심을 갖게 되어, 육식을 일절하지 않았으며 결혼 생각을 단념하고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형 이광헌이 참수치명하고 2개월 후 그 뒤를 따랐다.

▨ 남명혁·이연희 부부

남명혁·이연희 부부 “천국에 가려면 미쳐야 한다”

자택을 공소로 제공·가난한 이웃 위로

▲ 남명혁(南明赫)은 문벌이 아주 좋은 집에서 태어나 서울 서소문 근처에서 살았다. 서른에 입교했는데, 입교하기 전까지는 그 계층의 젊은이들이 대개 그렇듯 무위도식하며 방탕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유방제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는, 외인 친구들과 교류를 끊고 교리에만 전념했다. 회장으로 임명된 후에는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자기 집을 공소로 제공했고, 가난한 이를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 무렵 그는 친구들에게 “천국에 가려면 아무래도 미쳐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전해진다. 이광헌이 포졸들에게 급습 당한 그날 밤, 남명혁도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외국교를 배반하고 처자의 목숨을 구하라는 유혹에 “제 종교는 외국교가 아니라 만국(萬國)의 종교이며, 이 종교를 알고 봉행한 지가 8년째, 배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1839년 5월, 38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치명했다.

▲ 이연희(李連熙)는 남명혁의 처로, 그의 활동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자기 집을 공소로 내어주어 교우들이 여관처럼 사용하게 했으며, 주교와 신부를 보필했다. “교우는 천주를 위해 순량한 양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이런 훌륭한 기회를 놓지지 말라”는 남편의 충고를 듣고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참아냈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는 주의 가장 크신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남편이 순교하고 4개월 후 36세의 나이로 치명했다.

▨ 남이관·조증이 부부

남이관·조증이 부부 “같은 땅에서 함께 치명합시다”

오랜 귀양살이 후 외국인 신부 입국 도와

▲ 남이관(南履灌)은 명망 높은 가문의 교우 부



가톨릭신문  200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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