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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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는 진행 중… 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22·끝)「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해설

교회 존재·활동에 공동 책임자로서 임무 다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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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현대화)를 기치로 ‘회복’과 ‘쇄신’이라는 두 가지 축에서 현대사회를 통찰하고, 그것에 맞게 교회의 입장을 재정립한 거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에서 ‘회복’이라 함은 성경과 원전에 대한 충실성이고, ‘쇄신’이라 함은 교회가 인류를 대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움을 말할 것이다. 공의회는 교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아조르나멘토’를 하였다. 4개의 헌장,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문은 제각각 어떻게 아조르나멘토를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이하 「평신도 교령」) 역시 교회가 평신도에 대해 어떻게 ‘아조르나멘토’ 했는지를 말해준다. 공의회의 평신도에 관한 아조르나멘토는 2000년 교회사에서 세계 공의회가 21차례나 있었지만 평신도에 관한 논의는 처음 있었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2012년 10월부터 시작되는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신앙의 해’ 선포에서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고 있는 ‘새로운 복음화’는 바로 공의회의 ‘아조르나멘토’의 맥락에 있는 것이다.

교령은 크게 서론에 이어 평신도의 사도직 소명(2-4항), 평신도 사도직의 목표(5-8항), 사도직의 여러 분야(9-14항), 사도직의 다양한 형태(15-22항), 사도직에서 준수해야 할 질서(23-27항), 사도직을 위한 양성(28-32항)과 권고 등 모두 33항으로 구성돼 있다.

평신도도 하느님 백성

공의회의 가장 큰 결실 중 하나는 ‘평신도’의 신분과 입장을 교회 차원에서 분명히 하였다는 데 있다. 평신도에 대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근본적인 이해는 「교회헌장」 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를 ‘하느님 백성’(De Populo Dei)으로 보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를 ‘교계제도’(Hierarchia)로 이해했기 때문에 교계제도는 곧 교회고, 평신도는 그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헌장』 2장에 나타난 ‘하느님 백성’의 신학적 관점은 평신도와 사제를 근본적으로 동등한 관계로 올려놓았다. ‘교계제도가 교회고, 평신도가 하느님 백성이면, 교계제도 역시 하느님 백성이고, 평신도 역시 교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제와 평신도가 함께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메시아적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 백성이 곧 교회이다. 더 이상 교회는 하느님 백성을 심판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평신도는 존재와 기능 사이에서 ‘애매하게’ 규정된 ‘이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특별히 「평신도 교령」을 통해서 ‘확실한 존재’로 규정된 것이다. 그런 만큼 교령이 채택되기까지 진통 또한 컸다. 여러 차례에 걸쳐 토의에 부쳐졌고, 공의회 마지막까지도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못한 채 발표되었다. 「평신도 교령」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교회헌장(제4장 평신도에 관한 부분)과 공의회 폐막 전날(1965.12.07.)에 발표한 사목헌장을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다.

교령에서 눈에 띄는 점은 ‘평신도에 관한’이 아니라, ‘평신도의 사도직에 관한’이라는 점이다. 평신도의 사도적인 직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리더로서의 평신도 직분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소명에 관한 것이다.

교령은 처음부터 이제껏 말하지 못했던 진리의 당연하고도 명확한 표시로서, ‘교회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평신도를 못 박고 있다(1항). 이것은 교령 준비 위원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던 “‘평신도’라는 신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 교령은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효과적으로 참여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의 사명에서 맡은 자기 역할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수행하는 것이다”(2항)고 천명하고 있다.

평신도 사도직의 보편성

‘하느님 백성’으로서 평신도의 신분은 제도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례와 함께 규정된 것이다. 세례의 품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낳아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으는 것이다. 이 백성은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1베드 2,9-10) 교계제도나 성직자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느님 백성을 부르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초대하신 것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백성의 희망이고 성체성사로 이끄시며, 하느님 백성을 예언자로 가르치고 왕으로 이끌며, 사제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교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한다는 숭고한 과제를 교계에 참여하는 것으로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교계 역시 평신도를 하위 기구나 조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평신도의 고유한 사도직무가 보편성을 잃게 되고 교계를 위한 ‘특수성’에 머물러 협소해진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분의 가르침을 전수하는 데 있어 평신도와 교계는 똑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 임무는 성별, 연령, 교양, 환경의 차이를 불문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부터 받은 사도직의 권리이자 의무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엘리트 의식이 아니라 각자에게 부여된 특별한 영적인 은총(카리스마)이다.

그렇다면 세상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위대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도 교령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은 그 자체가 사도직에의 소명이기도 하다”, 또 “그 능력대로 교회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 지체는 교회를 위해서나 또 그 자신을 위해서나 아무데도 쓸데없는 지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2항) 다시 말해서 평신도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 자체가 얼마만큼 하느님 백성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존재와 행위,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는 가운데 “세상의 빛이 됨으로써 교회의 사도적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13항) 일상의 바쁜 삶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주어진 시공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평신도 사도직의 보편성은 또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평신도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성직자들과 봉헌생활자들의 성소의 기원이자 모든 교회 구성원들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평신도가 지닌 존재의 보편성에서부터 기능의 보편성에 이르는 방대한 부분을 포괄하는 것이다. 광범위한 현대세계의 상황에서 ‘현세의 일에 종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천국을 찾도록 불린 자’며, ‘스스로 임무를 수행하는 자’이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구원의 천상 복음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도록 활동해야 할 의무”(3항)를 모두가 지녔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1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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