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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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82) 8가지 참 행복 - 행복의 절정을 향하여

‘잡는 이’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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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쁨의 강물에 풍덩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얼굴. 우리 시대에 가톨릭 교회는 적어도 객관적으로 검증된 두 대표 주자를 배출했다. 그 하나가 복녀 마더 데레사이고 다른 하나가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그러기에 이들 이름에는 ‘효과’(effect)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마더 데레사 효과(Theresa effect)는 마더 데레사 사진만 보여줘도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결과가 얻어지더라는 실험치에서 나온 말이다. 이에 비할 때 프란치스코 효과(Francis effect)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매력에 이끌려 (다시) 성당에 다니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둘은 양상은 다르지만 사실상 내적으로 일정하게 합치되는 부분이 있다. 두 분 공히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던 행복의 샘을 톡 건드려주고 있고, 그 여운으로 신앙심까지 고무시켜 주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터다.

곧 한국을 방문하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의 그 여유로운 미소로 우리의 행복을 응원할 것이다.

“절인 오이 같은 일그러지고 슬픈 표정을 짓지 말라.”

‘절인 오이’! 우리말로 ‘오이지’다. 이는 아주 상징적인 표현이다. 본디 신학생과 남·녀 수도 지망자들을 겨냥했던 이 말은 이제 전 세계인이 공유하고 있는 유쾌한 잔소리가 되었다. 그런데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잇닿아 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4항)

요컨대, 기쁨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본령이요 매력이라는 것이다. 교황은 이 말릴 수 없는 기쁨의 행렬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큰 기쁨이 넘쳤고’(사도 8,8),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 차’(사도 13,52) 있었습니다.…그렇다면 우리라고 이 기쁨의 큰 강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복음의 기쁨」 5항)

대단한 열정이 자아내는 기쁨의 포효다.

■ 기뻐하고 춤을 추어라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행복의 대단원에 이르러 격한 환희를 우리에게 권면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이는 여덟 번째 행복인 ‘박해’의 상황을 상정한 권고지만, 사실 여덟 가지 행복 모두에 유효하다. 행복이 곧 기쁨이며, 기쁨이 곧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여덟 가지 행복을 무조건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화통하게 누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영적인 기쁨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지름길은 본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말씀의 속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여덟 가지 행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게 믿음, 희망, 사랑 이렇게 세 가지 범주로 나뉨을 알게 된다.

우선, 여덟 가지 행복 가운데 처음 세 가지는 크게 믿음(信)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가난’, ‘슬퍼함’, ‘온유’ 모두가 믿음의 에너지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감을 말한다. 하느님의 그늘 속으로 안기는 것을 말한다.

‘가난’은 자신 안에서 찾았던 풍요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지혜다.

‘슬퍼함’은 자신에게서 찾았던 위로를 하느님 품에서 발견하려는 부르짖음이다.

‘온유’는 더 이상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맡김이다.

다음으로, 여덟 가지 행복 가운데 네 번째 것부터 일곱 번째 것까지는 소망(望)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의’, ‘자비’, ‘마음 깨끗함’, ‘평화’ 모두가 소망의 에너지다. 소망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을 열심히 목말라하고 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얻기까지 몰입하여 바라는 것을 가리킨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은 말 그대로 추구하고 갈망하는 기운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도 적극적인 성취의 태도다. 안방에 앉아서 자비를 행할 수 있는가?

‘마음 깨끗함’도 부단히 갈고닦는 노력을 요한다. 가만히 앉아서 될 일이 아니다.

‘평화’를 이루는 것도 현장에로의 투신을 요구한다. 끊임없이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덟 가지 행복의 마지막 것은 사랑(愛)의 범주에 속한다.

‘박해’는 당연 ‘사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희생의 동기며 인내의 샘이다.

의로움을 위하여 ‘박해’를 받으려면 그 의로움 자체 및 그것을 기뻐하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결국 사랑의 힘으로 견뎌 내는 것이다.

물론, 기쁨은 노상 한결같지 않을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럴 때를 위하여 우리를 격려한다(졸저, 「교황의 10가지」 참조).

“물론 기쁨은 삶의 모든 순간에, 특히 가장 힘든 때에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기쁨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한 줄기 빛으로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는 끝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에서 생겨납니다. 나는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극심한 비탄 속에서도, 더디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확신으로, 점차 믿음의 기쁨이 되살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 비상을 위하여

미국의 영성가 헨리 나우웬이 어느 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 구경을 갔다. 공연에서 그네타기 곡예사 다섯 명은 멋진 묘기를 연출했다. 이 중 세 명은 ‘나는’ 역이었고, 두 명은 ‘잡는’ 역이었다. ‘나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다. ‘잡는’ 이의 강한 손에 붙들리기 전에는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다.

나우웬은 곡예사들의 용기에 감탄했다. 또한 이 아름다운 공연을 보고 ‘맡김’의 원리를 깨달았다.

“상대방이 자신의 손을 잡으려면 일단 내가 잡고 있는 그넷줄을 놓아야 한다. 움켜쥐었던 손을 펴야 비로소 새로운 차원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 내가 붙들고 있는 ‘그넷줄’을 놓아야 ‘잡는 이’ 야훼 하느님이 내 손을 잡고 아름다운 비행을 할 수 있다. 그래야 꿈의 세계를 날 수 있다.”

그렇다. 날기 위해서는 잡고 있던 그넷줄을 놓아야 한다. 그리고 ‘잡는 이’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고, 맡김으로써 비상을 해 보자. 행복의 나래를 펴보자.

여덟 가지 행복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꽉 움켜쥐고 있던 ‘종래의 삶의 방식’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오는 손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길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면 절로 비상의 환호성이 터지리라.

“나도 날 수 있어. 봐, 날잖아! 나도 행복해, 행복하다구. 행복에 빠져 깨가 쏟아진다구…….”




가톨릭신문  201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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