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84) 성경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1) - ‘생활형 기도’

성경 인물들의 기도, ‘머리’로만 만나면 ‘꽝’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생활 기도 연재의 변

새복음화 일환으로 기획된 시리즈 가운데 ‘참된 행복 8가지’ 꼭지가 지난 호로 마감되었다. 그 몇 주 전에 신문사 측과 다음 주제에 대하여 숙의한 결과 ‘기도’ 그것도 ‘생활 기도’가 좋겠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기도! 그렇다. 기도는 사실 본 칼럼이 지금까지 소상히 다뤄왔던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중요한 대목에 해당한다. 또한 기도의 재미는 실질적으로 새복음화의 결실이면서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주제를 정하면서 ‘생활 기도’의 전범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를 고민했다. 답은 이내 영감으로 찾아왔다. 성경 속 인물! 이 아이디어에 벌써 글 쓰는 이의 가슴은 설렘으로 쿵쾅거린다. 만남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 만남에 대하여

성경 속에서 우리는 우선 ‘인생 선배’들을 만난다. 말 그대로 수많은 옛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보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산 사람은 이렇게 성공하고 이렇게 행복을 얻는구나, 저렇게 산 사람은 저렇게 실패하며 저렇게 불행해지는구나…….”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들 인생의 선생님인 셈이다. 물론 ‘타산지석’이라는 말도 있듯, 실패한 인물들 또한 우리의 선생님이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얼마나 많은 지혜를 건져 올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성경 속에서 인물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도’를 만난다. 저마다 삶의 우여곡절이 펼쳐지는 가운데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순간을 경험한다. 어떤 기도는 금세 응답받고, 어떤 기도는 거절당하기도 한다. 응답이 오기까지 한 평생을 기다려야 했던 경우도 있다. 성격 따라 기도의 방식도 다채롭다. 요컨대, 그들에게 세상만사 희로애락이 기도의 자리이며, 생사화복과 흥망성쇠가 기도의 결실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무진장한 영감의 지대를 넘나들며 그들의 기도 속으로 흠뻑 잠겨볼 모양이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해서 바로 ‘나 자신’을 만난다. 희한하게 자신과 만난다. “이게 나구나. 내가 몰랐던 내가 여기 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저 평범한 존재인 줄 알았던 내가 ‘참 소중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와 동시에 “내 뿌리가 여기 있구나” 하며 과거의 내 모습을 만나고, “지금 살고 있는 내 본모습이 이런 모습이구나” 하면서 현재의 내 모습을 만나며, 나아가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구나”라는 것을 인식하며 미래의 내 모습을 만나는 것이다.

■ ‘나’를 위한 레마

하지만 우리가 성경 속에서 인생 선배들과 그들의 기도를 아무리 풍요롭게 만나더라도 ‘머리’로만 만나면 꽝이다.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통상적으로 두 가지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첫째, 말씀은 우선 로고스, 곧 진리로 다가온다. 성경은 일단 말씀 자체로는 ‘로고스’(Logos: 요한 1,1 참조)다. 이 말은 지혜, 말씀, 진리 등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로고스는 아직 ‘그림의 떡’이라 할 수 있다. 즉, 나와 관계 맺지 않은 말씀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이지만 아직 나와 끈으로 연결되지 않은 말씀이 로고스인 것이다.

둘째, 말씀은 때때로 레마 곧 나를 위한 개인적 메시지로 다가온다. ‘레마’(Rema)는 ‘말’, ‘진술’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명사인데, 이는 ‘하느님께서 손수 어떤 특정인에게 주신 말씀’을 뜻한다. 즉,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나 야곱, 모세 등의 인물들에게 친히 주신 말씀들을 가리킨다.

앞으로 ‘생활형 기도’의 전범으로서 성경 속 인물들의 기도를 기술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위의 두 가지 의미가 균형 있게 살려질 것이다. 물론, 글 속에 서려있는 성령께서 독자들 심상에 맞게 로고스와 레마를 안배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의 기도가 되겠다.

말씀이 레마로 다가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와 관련하여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자.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이전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유다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인정받고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대전 중 치렀던 무고한 대량학살을 대가로 자신들의 팔레스타인 종주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에 유다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스라엘로 모여왔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바로 땅에다 입술을 맞추면서 다음의 성경구절을 읊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탈출 19,4).

얼마나 아름다운가! 유다인들은 3천 년 전에 쓰인 성경구절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마치 그들이 타고 온 비행기를 ‘독수리’라 여기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이곳으로 인도해 주셔서 “마침내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며 고백한 것이다.

■ 내가 만난 레마

나에게도 인생의 고비, 선택의 순간마다 함께해 준 말씀이 있다. 바로 내 인생을 바꾼 레마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기숙사에서 개신교 선배들과 이른 아침에 만나 소위 ‘큐티’(QT: quiet time)를 하곤 했다. 그때 나에게 로마서의 한 말씀이 레마로 ‘탁!’ 다가왔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이 말씀이 가져온 두근거림은 사뭇 달랐다.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두근두근 거리지?” 하고 그 말씀을 피하고만 싶었다. 산 제물로 바치라니, 조금 과하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읽으려고 건너뛰려고 했는데 레마는 도망갈 길도 없다. 이 말씀이 나의 가슴을 막 고동치게 하고, 이리 몰고 저리 몰고 가더니, 결국 신학교에 들어가도록 몰았다. 레마를 만나면 이러하다.

한번은 내가 한 오 년 동안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느님이 침묵하셨던 적이 있다. 하나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름대로 꼭 이루고 싶은 마음으로 기도했는데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기가 나에게는 혹독한 시련기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정말 하느님이 계신 겁니까? 안 계신 겁니까?”라며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응답이 왔는데 그때 나에게 스쳐온 말씀이 바로 레마였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루카 12,6-7).

“도대체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거예요 안 들어주시는 거예요? 기도하는 것은 알고 계시기나 한 거예요?”라고 내가 한탄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레마의 말씀으로 위로를 주셨던 것이다.

“나는 네 머리카락까지 다 세고 있었다. 네 한숨소리까지 다 세고 있었느니라. 밤에 뒤척이면서 몇 번이나 한숨 쉬었는지까지 너네들은 다 기억 못해도 난 다 세어두고 있었다.”

이 말씀이 레마로 온 뒤,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가톨릭신문  2014-09-23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3. 29

집회 2장 6절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