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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박해기 - 강제 수용소의 선교사들] (21) 한국인 신부도 결국 노개영에서 선종

국영농장 노개영으로 간 김선영 신부/ 1974년 2월 북안 노개영에서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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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녀 최경숙씨.
 
한국인 사제들의 박해 또한 계속 이어졌다. 길림교구 교구장 까스페 주교는 한국인 사제 양세환 신부를 장개석 국민당의 미군 통역을 하게 했었는데, 이런 것 때문에 양세환 신부는 장개석 정부의 간첩으로 몰려 1950년 체포돼 장춘감옥에 갇혀 무기노개형을 받았다. 양세환 신부는 폐병에 걸린 데다 영양이 없는 소량의 음식을 먹고 힘든 양곡 나르는 노동을 해 심한 각혈을 했다고 한다. 결국 양 신부는 15년 동안 힘든 노동을 하다가 1965년 11월 4일 옥사했다.

김선영 신부는 1967년 15년에 걸친 노개형을 마쳤으나 애국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 2노개를 받게 됐는데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평산 노개영 휴양소에 잠시 있다가 러시아와 중국 접경지역인 북만주 북안 인용하 국영농장 노개영으로 가게 됐다.

날씨가 매우 추워 하수도조차 만들 수 없는 북안 지역 노개영은 형무소만도 못한 곳으로 중죄인이나 가는 곳이었다.

김선영 신부는 형이 끝나고 2노개를 하므로 한 달 봉급으로 18원(한국 돈 1800원)을 받았다. 김선영 신부가 한국인 최경숙 동정녀에게 보낸 서신중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곳 기후는 특별히 춥고 바람이 자주 불어 매우 괴롭습니다. 노동은 경노동으로 지금은 집에서 마늘 껍질을 벗깁니다.”

김선영 신부가 70세가 넘었으므로 마늘 껍질을 벗기는 일을 부여받았다. 김선영 신부는 신자들에게 거리가 멀어 경비가 많이 드니 면회를 오지 말라고 당부했을 뿐 아니라, 북안 농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김선영 신부를 ‘호인(好人)’, ‘대인(大人)’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김선영 신부는 72세에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으며, 1974년 2월 12일 북안 노개영에서 선종했다.

당시 한국인 지동의씨가 김선영 신부의 옷 중에서 제일 나은 것으로 골라 수의로 입히고 농구화를 신겨 매장했다. 김선영 신부의 사망 카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반혁명 분자, 면회 오는 사람 없음. 사망일 1974년 2월 12일”

최경숙 동정녀와 강순옥 동정녀는 1986년 북안에 있는 김선영 신부의 묘를 찾아갔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지동의씨와 한국인 이씨 그리고 중국인 3명이 묘를 발굴해 유해를 명주에 부분별로 쌌다. 김선영 신부의 유해는 1987년 5월 6일 한국에 도착했다. 김 신부의 유해는 서울 명동성당 지하 소성당에 5일간 유해를 안치됐으며 5월 11일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위령 미사를 봉헌했다. 추모식에서는 김 신부의 제자인 오기선 신부가 추도사를 읽었다. 김 신부의 유해는 바로 오기선 신부의 주도로 한국에 옮겨질 수 있었다. 김 신부의 막내 누이동생 김임순 동정녀의 증언에 의하면 김 신부의 모친 이치도 마리아 여사는 날마다 묵주를 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우리 신부 언제 보나?” 하며 외아들 신부를 애타게 그리다 만 92세에 선종했다고 한다.


서양자 수녀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만 유학을 거쳐 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에 소속돼 있다. 저서로는 「중국천주교순교사」,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등이 있다.


서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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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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