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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124위 열전]

<38> 김사집 프란치스코-가난한 이들에게 온정 베풀며 교회 서적 나눠주다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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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김사집

박해시대 신자들은 특히 향주덕, 곧 믿음(신덕)과 희망(망덕), 사랑(애덕) 등 하느님께 대한 덕행을 깊이 묵상하며 그 실천에 힘썼다(로마 5,1-5 참조).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나타낸다는 뜻에서 ‘대신덕’(對神德)이라고도 불리는 향주덕을 통해 신자들은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과 일치를 이뤘다.

124위 순교복자 가운데 일명 ‘성옥’이라고도 불린 김사집(프란치스코, 1744∼1802) 복자는 특히 향주덕 실천에 열렬했다. 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 순교자전」에도 “그는 신ㆍ망ㆍ애 3덕에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는 기록이 전해져올 정도다.

이처럼 향주덕에 굳셌던 김사집은 충청도 덕산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창말) 출신이다. ‘내포교회의 요람’ 출신인 셈이다. 양반가는 아니었고 양인 집안 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을 꿈꿨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한 뒤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유학 공부를 포기하고 세속과 단절하면서까지 서학, 곧 천주교 공부에 몰입한 그는 기도와 영적 독서로 일상을 보내면서 타고난 슬기와 재능, 애긍을 통해 복음을 전파해 나갔다. 그의 일상은 기도와 독서, 전교였던 셈이다.

특히 평소에 얼마나 착하고 정이 많았는지 그는 새 옷이 생기면 헐벗은 이에게 주고, 이웃에 궁핍함이 생기면 사랑으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덕 중에 가장 큰 덕인 애덕 실천에 그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부모에게도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사방에서 효자라는 소리를 들었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상중 2년간 육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아가 유학 공부에 전념했던 자신의 학문적 전력을 살려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해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눠줬다. 1801년 신유박해 직후 그가 체포된 것도 그가 교우들에게 나눠줬던 서적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일설엔 당시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에게서 압수된 서적의 다수는 그가 필사한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이 관아에 알려졌다고 한다. 이에 관아에서 두 사람이 천주교인으로 가장해 그를 찾아와 복음서를 한 부 베껴달라며 탐문하고 돌아간 후 얼마 안 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했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그는 관장으로부터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아야 했다. 배교하면 풀어주겠다는 유혹, 배교를 강요하는 형벌을 함께 받아야 했지만 그의 마음은 철석과도 같았다. 당시 형벌로 극심한 고초를 겪던 그의 심회는 자식들에게 보낸 옥중편지를 통해 전해온다.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님의 도우심에 의지해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해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은 가족, 특히 자식을 보지 않고 신앙을 지키겠다는 단호함으로 드러났다.

그해 11월 덕산에서 해미로 압송된 그는 치도곤 90대를 맞아야 했고, 다시 2개월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청주병영에 이송됐다.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길은 지금으로 따져도 130여㎞, 차로 가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길이다. 이 길을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엄동설한, 혹한의 추위에 사흘 넘게 걸어야 했으니 얼마나 큰 형극의 길이었을까. 백발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산발이 됐고,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옷 사이로 스며들어 달라붙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뗄 때마다 피로 엉겨붙은 옷자락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을 터다. 그런데도 그는 극진한 인내로 고통을 참고 견디며 신앙을, 마음의 평온을 결코 흩트리지 않았다. 다블뤼 주교도 그래서 “사흘이나 걸린 이 무서운 길을 가는 내내 그는 훌륭한 모습을 유지했다”고 기록한다.

청주병영에 도착해서도 고문이 그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그 고문도 그를 꺾지는 못했다. 그는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으로 신앙을 지켰고, 이듬해 1월 25일 사형을 선고받은 뒤 곤장 80대를 맞고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끝까지 열렬한 신앙과 희망과 자애를 보여주었으며, 그의 마음은 철석같이 단단했다”고 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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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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