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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124위 열전] <43> 김강이 시몬

체포돼 빼앗긴 재물 되찾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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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김강이

‘사학 단속, 곧 천주교 신자에 대한 검문이나 기찰, 체포가 포도청이나 지방 관아의 ‘금조’(禁條) 규정에 포함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초기였다. 이후 포도청의 기찰ㆍ체포 범위는 갈수록 확대돼 1839년 기해박해 때는 경포(京捕), 곧 서울의 포졸들이 경기 지역까지 드나들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엔 충청도와 경상 북부 지역까지 파견됐다.

이처럼 포졸들이 천주교인 체포에 집착한 것은 신자들을 잡으면 도둑을 잡은 것과 마찬가지로 품계를 올려주거나 포상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층 신자들을 체포한 경우에는 포도청 군관들에게 그 공로에 따라 1ㆍ2ㆍ3등으로 구분해 상을 내렸다. 또 암암리에 신자들의 재산을 사적으로 몰수해 착복하는 사례까지 생겨났다. 그래서 지방 관아 포졸들조차도 천주교 신자들을 잡는 데 혈안이 됐다.

강원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원도 울진현(현 경북 울진군)에 살던 김강이(시몬, ?∼1815) 복자 역시 1815년 을해박해 때 안동의 포졸들에게 체포돼 재산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그는 용감하게 안동의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빼앗긴 재산을 돌려줄 것을 요청해 되돌려받았고, 돌려받은 재산을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던 교우들에게 나눠줬다. 관장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재산을 되돌려준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되찾은 재물을 교우들과 함께 나눈 자선 실천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이같은 용덕을 보여준 김강이 복자는 본래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 태생이었다. 장성한 뒤에야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성품도 용맹하고 고상했을 뿐 아니라 재산도 많았다. 하지만 입교한 뒤에는 자신의 재산과 종들을 모두 버리고 아우 김창귀(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전라도 고산현, 지금의 전북 완주군에 가서 살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고산현을 방문하자 여러 차례 주 신부의 처소에 가서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1801년 신유박해 기간에는 교회 지도층 신자로 지목돼 1년 동안 피신을 다녀야 했다. 이때 체포된 그의 아내는 1년간 옥살이 끝에 많은 돈을 쓰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박해가 끝난 뒤 김강이 복자는 포졸들의 염탐이나 기찰을 피하고자 이곳저곳으로 등짐장사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했다.

박해가 진정되자 그는 농사를 지으며 정착할 곳을 찾는다. 경상도 진보현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길 일대)에 들어간 그는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며 교우촌을 일궜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곳을 전전했고, 그러다가 강원도 울진현에 정착한다.

그가 포졸들에게 체포된 것은 1815년 5월께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일대를 휩쓴 을해박해가 일어나면서다. 과거 자신의 종이었던 교우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 조카 김사건(안드레아)과 함께 체포된 그는 경상도 안동 관아에 수감돼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지만 꿋꿋이 신앙을 지켰다. 이어 동생과 함께 자신이 살던 강원도 감영이 있던 원주로 이송돼 또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이때 동생은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를 갔지만, 그는 어떤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 어떤 고통도 순교 원의로 가득 찬 그의 신앙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김강이 복자가 보여준 열렬한 신앙과 인내는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다. 결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강원 감사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임금의 윤허를 받고자 장계를 올린다. 이때 강원 감사가 올린 장계 내용 일부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그는 비밀리에 신자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소식을 전해 왔으며,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혀 온몸으로 깊이 빠졌습니다. 이에 합당한 법률을 시행토록 허락해 주십시오”(「일성록」 순조 을해년 10월 18일).

이 장계에 순조는 즉시 사형 집행을 윤허했다. 그러나 김강이 복자는 이미 형벌로 인해 받은 상처가 심해진 데다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이 악화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이로 인해 복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지기도 전에 옥사한다. 이날이 1815년 12월 5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50세였다고 한다. 그 순교지는 강원감영 내 옥터,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85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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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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