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복자 124위 열전] <44> 김희성·김종한

순교한 아버지의 신앙 이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 살다 기쁘게 순교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경북 동북부 봉화ㆍ영양ㆍ청송군은 조선 후기에도 3대 오지로 꼽혔다. 그랬기에 천주교 신자들, 특히 충청도 내포 출신 신자들이 험준한 낙동정맥(태백산맥) 내륙에 몰려들어 교우촌을 이뤘다.

현재의 경북 봉화군 재산면 새골길(갈산리) 일대 봉화 ‘우련밭’이나 새골길에서 영양군 수비면 남회룡로(신암리) 경계에 걸쳐 있는 영양 ‘곧은정’도 숱한 경상도 교우촌 가운데 일부였다. 지금도 봉화군은 1읍 9면에 인구 3만 4000여 명이 사는 작은 지방 자치 단체이고, 1읍 5면의 영양군은 지금도 군 전체 인구가 1만 8000여 명에 그쳐 읍 설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오지다.

이처럼 험준한 산악 지역의 척박한 풍토 속에서도 신자들은 굳게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그렇지만 1815년에 일어난 을해박해로 우련밭이나 곧은정 교우촌은 와해되다시피 한다.

 
 

▲ 복자 김희성
 
 
당시 곧은정 교우촌에서 살다가 잡혀가 순교한 복자로는 내포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출신의 김희성(프란치스코, 1765∼181)이 있다.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김광옥(안드레아) 복자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후엔 유학을 버리고 교리를 배우는데 힘썼다. 교리 공부를 통해 열심한 신자가 된 그는 기도와 자선 실천에 앞장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그의 열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의지 또한 더 굳어졌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경북 영양군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바로 영양현 곧은정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하고 육신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살았고, 급한 성격을 극복했으며, 오래지 않아 ‘인내의 모범’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10여 년간에 걸친 신앙 생활도 을해박해가 일어나면서 막을 내린다. 밀고자가 포졸을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산에 올라가 있던 그는 아들 문악에게 “나는 천주님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하고 말하고는 기쁜 낯으로 포졸과 밀고자를 따라 나섰다.

안동 진영에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그는 결코 굴하지 않았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후에도 감영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였다. 이후 동료들과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하던 그는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져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 복자 김종한
 
영양현 우련밭(현재 봉화군)에서 오랫동안 숨어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김종한(안드레아, ?∼1816) 역시 내포 출신이다.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에서 태어난 그는 김진후(비오) 복자의 아들이자 성 김 데레사의 아버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다. 족보에는 이름이 ‘한현’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신자들 사이에서는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785년 이전에 입교한 맏형 김종현에게 교리를 배워 몇 년 뒤 입교했다. 그의 부친 김진후는 체포와 석방, 형벌, 유배를 번갈아 당하다가 1814년 해미옥에서 옥사했는데, 그동안 김종한의 신앙은 오히려 굳건해져 언제든지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추게 됐다.

김진후가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김종한은 자신의 가족과 함께 홍주(현 홍성)를 거쳐 영양현 우련밭에서 살았다. 그는 특히 교리 실천에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이웃을 위한 자선 실천, 신심을 함양을 위한 극기행위는 일상이었다. 낮에는 교회 서적을 필사해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놓고 가르쳤다. 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해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체포돼 안동을 거쳐 대구로 이송돼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옥에 갇힌 지 1년 6개월 가량 지나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초대 교회 이후 그리스도교에 나타나는 영성의 특징 중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희성이나 김종한 등 을해박해 순교 복자들의 삶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적 삶’이라는 영성이 공통으로 드러난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종한은 “무슨 일이든지 예수를 위하여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삶의 최종 목적인 천국은 예수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힘줘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들 순교 복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행복한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5-01-09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19

지혜 3장 15절
좋은 노력의 결과는 영광스럽고 예지의 뿌리는 소멸되지 않는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