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복자 124위 열전] <45> 박경화·박사의 부자

부자가 함께 체포돼 신앙 지키다 아버지는 옥사, 아들은 참수 당해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전라도 교회를 초토화한 1827년 정해박해는 관아에서 주도한 박해가 아니라 신자들 간 사소한 다툼이 불러온 불미스러운 고발 사태로 빚어진 박해였다.

그해 2월 전남 곡성 덕실현(현 전남 곡성군 오곡면 승법길 일대) 옹기 마을에서 주막을 하던 신입 교우 전씨가 지나치게 술을 마신 한백겸이 자기 아내에게 욕설을 하고 손찌검을 하자 홧김에 현감을 찾아가 천주교인들을 고발했다. 이 사건을 기화로 시작된 박해의 불길은 장성과 순창, 임실, 용담, 금산, 고산, 전주로 번졌고, 당시 전라도에서 체포된 신자만 240여 명에 달했다. 심문 과정에서 타 도에 거주하는 신자들의 이름이 밝혀져 경상도와 충청도, 서울 등지로 박해가 확대됐으며, 전라도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500여 명이 붙잡혔다.

그런데 다른 박해와 달리 순교자가 훨씬 적고, 배교자도 많았다. 그 이유는 당시 전라 감사 김광문이 가능한 한 사형을 피하고, 사형선고를 할 수밖에 없는 신자들은 참수하기보다는 무한정 옥에 가뒀기 때문이다. 1839년 기해박해 때까지 갇혀 있다가 순교한 신자도 8명이나 된다.

 
 

▲ 복자 박경화

▲ 복자 박사의
 
충청도 홍주현(현 충남 홍성군)의 양반 집안 출신 박경화(바오로, 1757∼1827)ㆍ사의(안드레아, 1792∼1839) 부자 또한 정해박해 때 체포돼 아버지는 정해박해 때, 아들은 기해박해 때 각각 순교,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복자품에 올랐다.

30세 무렵에 부모를 여의고 신앙을 받아들인 복자 박경화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794년 박해로 체포됐으나 형벌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된다. 하지만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그의 신앙적 열심을 배가하는 계기가 됐다. 더 철저히 신자 본분을 지켰고, 자유로이 신앙 생활을 하고자 산중으로 이사하기까지 했다. 아들 박사의 또한 나이가 들수록 모범적인 신앙 생활과 지극한 효성으로 이웃에게 칭찬을 한몸에 받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박경화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으며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썼다. 특히 자녀들이 열심히 신앙적 덕행을 닦도록 모범을 보였다. 60세를 넘기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 가마기(현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리1∼5길)로 이주해 9년간 교우들과 공동체를 이뤄 신앙생활을 했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길 일대)으로 이주했으며, 그해 4월 말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됐다.

상주로 끌려가면서도 기쁨에 찬 표정으로 “오늘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 천주님께 감사를 드리자”고 말한 탓에 박경화는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됐고, 다른 교우들보다 훨씬 더 많은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신앙을 꺾지 않았고, 늙은 자신의 육신보다 다른 교우들을 보살피는 데 힘썼다. 도저히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주 관장은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했고, 그의 자식들 또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모두 대구로 끌려갔다. 하지만 장남 박사의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됐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가 한 승려와 벌인 교리 토론은 오늘까지도 전해져온다. 신심으로 자신의 손가락 네 개를 절단했다고 전해지는 그 승려는 대구 진영 영장의 명으로 토론을 시작하자 박경화가 몇 마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횡설수설하면서 답변을 하지 못했고 당혹감에 휩싸여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고 한다.

이어 새로운 감사가 부임한 뒤 옥에서 끌려 나와 형벌을 받던 고령의 박경화는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유언을 아들에게 남기고 옥사한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아들 박사의 또한 상주를 거쳐 대구로에 압송돼 아버지와 함께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의 힘으로 참아냈다. 특히 고령의 아버지를 보살피고자 관장에게 함께 형벌을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은 뒤 아버지를 돌본 일화는 유명하다. 박사의와 그의 동료들은 12년간 대구 감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 5월 26일이 돼서야 참수형을 받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5-01-16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3

시편 80장 3절
주님의 권능을 깨우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