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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진주 진영 진주 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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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윤봉문 복자 순교 터로 전해져 두 순교자 시복 위한 현지 신자들의 현양 열기 식을 줄 몰라

▲ 진주 진영과 진주 옥터 자리.

울산에 경상 좌병영이 있었다면 진주에는 경상 우병영이 자리했다. 임진왜란이 계기였다.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에 벌어진 진주성 1 2차 전투로 호남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진주의 위상이 부각되면서 1602년 경상우도 병마절제사영 곧 경상 우병영이 창원 합포(마산)에서 진주성 안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 우병영이 진주로 옮겨지기 이전부터 설치돼 있던 진주목은 성 밖에 그대로 뒀다. 한동안은 두 직책을 경상 우병사가 겸직했지만 나중엔 따로따로 임명됐다. 이 때문에 경상 좌병사가 울산 도호부사를 겸직하던 경상 좌병영 곧 울산 병영은 순교지가 됐고 최근 들어 순교성지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경상 우병영은 순교지가 되지 않았고 진주 목사가 집무하던 치소 곧 진주 진영이 순교지가 됐다. 정3품인 진주 목사는 종2품인 경상 우병사보다 품계가 낮았지만 문관인데다 행정권에 사법권 병권까지 갖고 있어 산하 부서인 진주 진영장을 통해 사학죄인이던 천주교 신자들을 문초하고 형벌을 집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정찬문(안토니오 1822∼1867)과 124위 순교복자 중 가장 늦게 순교한 윤봉문(요셉 1852∼1888)은 진주 진영과 진주 옥에서 순교했고 리델 신부 복사였던 구한선(타대오 1844∼1866)은 진주 진영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집으로 돌아와 장독으로 이레 만에 선종했다. 2016년으로 150주년을 맞는 병인박해는 먼 과거의 일이 됐다지만 6ㆍ25전쟁 당시 진주시는 진주성 촉석루까지 불탈 정도로 초토화된 터여서 순교지의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기에 지난해 8월 시복된 정찬문ㆍ윤봉문 두 순교복자의 순교 터를 찾는 순례 여정은 힘겹기만 하다. 순교성지를 관할하는 마산교구 옥봉동본당 정은교(루치아노 68) 전 총회장과 진주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는 김수업(토마스 아퀴나스 76) 전 대구가톨릭대 총장의 도움으로 겨우 진주 진영 터와 진주 옥터를 찾을 수 있었다. ▲ 대구가톨릭대 총장을 역임한 김수업 교수가 지금의 진주중앙요양병원에 자리에 있었던 옛 진주 진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18세기 진주성 공북문 앞 대사지 인근에 정찬문 순교복자 등이 신앙을 증거하고 피를 흘린 순교 터인 진주 진영이 자리잡고 있었다.

충절의 땅에서 순교의 얼 담은 고장으로 남강을 끼고 진주로 가는 순례 길은 비단을 펼쳐놓은 듯 매혹적인 여정이다. 덕유산에서 발원 경호강과 덕천강 등과 합류한 뒤 진주에서 북동쪽으로 유로를 틀어 낙동강과 합류하는 남강의 풍광은 순례자들에겐 덤이다. 그 강을 따라 펼쳐진 사적 제118호 진주성 성곽과 촉석루 논개의 충절이 아로새겨진 의암바위에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까지 일품이다. 이러니 2012년 CNN에서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관광지 50선’에 뽑히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싶다. 그렇지만 오늘의 진주성은 내성만 남아 있다. 공북문을 시작으로 촉석루까지 이어지며 내성을 에워싸며 쌓았던 외성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에 파놓은 해자 역할을 하던 대사지(大寺池)를 메우고자 1930년대에 허물었고 그 앞에 있던 진주 진영도 없어졌다. 그 진영이 바로 순교 복자들의 증거 터이자 순교 터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따르면 진주 진영 뜰 곧 영정은 정찬문 복자가 치명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124위 순교복자 약전엔 그가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에 숨을 거뒀다고 기록돼 있어 정확한 순교 터는 현재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옛 진영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문지리 전공자인 김덕현(경상대) 교수나 지역사 전공인 김준형(경상대) 교수에 따르면 지금의 진주시 촉석로 178 진주 중앙요양병원 자리로 추정된다. 진주경찰서 뒤쪽이니 찾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옛 진영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최근 진주성 외성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하니 이참에 진주 진영도 복원되길 바랄 뿐이다. 김수업 진주문화연구소장은 “실은 6 25전쟁으로 완전히 폐허로 변해 진주는 옛 자취를 찾기 어렵게 됐지만 현 진주시 교육지원청 자리에 있던 대사지 뒤쪽 중앙요양병원이 순교지로 추정되고 있다”면서 “군사를 움직이고 토포의 역할을 하던 진주 진영장의 무관이 진주목 관할 12개 군에서 잡혀 온 순교자들을 심문하고 혹형을 가했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 옛 진주 옥 내에 있던 우물은 시멘트 뚜껑에 덮여 있지만 지금도 진주중앙시장 어물전에 남아 있다. 사진 중앙 우측 부분이 우물을 시멘트로 메운 흔적이다.

▲ 옛 진주 옥이 자리잡고 있던 감옥은 현재 진주중앙시장이 됐다. 8

진주 옥터 우물은 어물전에 묻히고 진영을 나와 진주 옥터로 향했다. 진영에서 500m도 안 되는 자리에 있는 옥터는 정천문 복자가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 치명한 곳으로 또 거제 회장에 임명돼 로베르 신부를 안내했던 윤봉문 복자가 혹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십계명을 외며 신앙을 굳게 증거하다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진주 옥은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547번길 8-1 지금의 중앙시장 내 어물전에 남아 있는 지름 2m의 우물 인근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우물 동쪽에 지은 옥사는 중앙시장과 옥봉동성당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물전 상인 정방자(72)씨에 따르면 이 우물은 1966년 2월 진주 공설시장의 대화재로 모든 상가가 불에 타자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사람이 지나다니기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콘크리트로 뚜껑을 만들어 덮으면서 우물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다만 어렴풋이 그 우물터 뚜껑 표식이 남아 있어 이곳이 진주 옥 우물이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진주 진영 혹은 진주 옥에서 치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찬문 복자 유해는 마산교구 문산본당 사봉공소 관할 구역 내인 진주시 사봉면 동부로 1751번길 46-6에 안장돼 있다. 또 진주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윤봉문 복자는 진주 비라실에 안장됐다가 훗날 유족들에 의해 지금의 옥포인 진목정 족박골 산으로 옮겼다가 2013년 4월 경남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 3길 69-22로 이장했다. 1975년 4월 정찬문 복자 유해 이장에 참여했던 정은교 옥봉동본당 전 총회장은 “시복에 앞서 진주 시내 본당은 물론 전 교구 본당이 시복을 위한 기도 운동을 했고 지금은 시성을 위해 기도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전하고 “진주 시내 본당에서는 다들 이들 복자를 기리고자 해마다 봄 여름이면 정찬문 순교복자의 묘역으로 도보나 자전거 등으로 순례를 다니고 있다”고 현지의 순교자 현양 운동 열기를 설명했다. 글ㆍ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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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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