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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통영 통제영 중영관아·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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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을 관할했던 통영 통제영 중영관아·옥터서 김기량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순교

오늘날로 치면 육군 기지라고 할 수 있는 ‘병영(兵營) 순교지’가 있다면 해군 기지 격인 ‘수영(水營) 순교지’도 있다.

경상 좌병영인 ‘울산 병영 순교성지’가 대표적 병영 순교지라면 충청 수영인 오천성(현 충남 보령시 오천항) 인근 ‘갈매못 성지’와 경상 좌수영인 동래(현 부산시 수영구) 수영 ‘장대골 순교성지’는 대표적 수영 순교지다. 그런데 정2품 무관인 병마절도사(약칭 병사)가 관장하던 병영보다 품계가 한 단계 낮은 정3품 외관 수군절도사(수사)의 군영인 수영 순교지가 더 많다는 점이 이채롭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300년 내내 충청 수영과 경상 좌ㆍ우수영 전라 좌ㆍ우수영의 삼도 수군을 관할하며 조선 수군의 본영이 된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를 잡았던 통영 또한 대표적 수영 순교지다.

▲ 조선 후기 300년 삼도수군을 관할했던 통제영 안내도. 통제영 입구 아래 건물(왼쪽 붉은 점선 부분)이 증거 터인 중영청 통영시 향토역사관과 통제영 관리사무소 앞 부지(오른쪽 점선)가 순교 터인 중영 옥터 자리다.

‘제주의 사도’ 순교 영성 깃든 곳

124위 순교 복자 가운데 ‘제주의 사도’로 불리는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16∼1867)이 삼도수군통제영 내 중영 형소(형리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나서 옥사함으로써 통제영은 교회사와 인연을 맺는다. 이어 1869년에도 부산 동래 수영 출신 신자 8명이 통제영에 끌려와 참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1887년 경상우수영이 있던 거제에 신앙의 씨앗을 뿌려 ‘거제의 사도’가 된 윤봉문(요셉 1852∼1888)이 거제에서 잡혀 통제영에서 문초를 받고 이듬해 2월 진주진영으로 이송돼 순교했다. 이처럼 1895년 폐영되기까지 기록이 남아 있는 순교자만 9명이 피를 흘렸고 더 많은 신자가 잡혀 와 혹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거한 통제영은 한국 교회의 빛나는 순교성지가 됐다.

통제영이 순교지가 된 것은 김기량 복자에게서 비롯된다. 김기량은 1857년 2월 무역차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하던 중 중국 광둥 성 해역에서 구조돼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음에도 여느 때처럼 무역하러 동료들과 함께 통영 바다에 나갔다가 그곳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된다. 통영 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음에도 굳게 신앙을 지켰고 통영 관장은 대구 경상 감사에게 이 같은 사실을 보고한다. 경상 감사는 “김기량 일행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행은 관아 포졸들에게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목숨을 부지하자 관장은 이들을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한다. 이날이 1867년 1월로 관장은 특히 김기량에겐 교수형을 집행한 뒤 가슴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순교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통영 하면 ‘예향’이라는 이미지가 앞선다. 유치환의 시 ‘행복’이 먼저 떠오르고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나 김춘수 시인 「토지」의 작가 박경리 한국의 대표적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유치진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전혁림 화백 등의 기억이 뒤따른다. 예향답게 소박하고도 운치 넘치는 항구 통영의 동피랑 벽화 골목을 지나 세병로로 들어서니 언덕배기에 그 유명한 ‘통제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헐려 2013년까지 13년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겨우 3분의 1밖에 되살리지 못했다고 하는데도 세병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운주당과 경무당 병고 주전소 열두 공방 등 관아와 부속 시설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면적만 4만 6638㎡에 이른다.

그 통제영 입구인 망일루에 들어서기 전 큰길 왼쪽에 자리한 중영(중영청) 곧 삼도수군통제사의 부장이자 참모장 격인 우후(虞侯)의 군영인 우후영이 김기량 복자 등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했던 증거 터로 추정된다.

▲ 김기량 복자 등이 신앙을 증거한 통제영 중영 정문 형소(오른쪽 건물).

▲ 통영시 향토역사관 아래에 있는 통제영 관리사무소 오른쪽 앞 공터와 도로 주변 부지가 김기량 복자 등이 순교한 통제영 중영 옥터다.

통영 향토사 연구자인 김일룡(68) 통영문화원장에 따르면 현재 복원된 중영 정문 옆 건물이 통제영에 압송된 신자들이 문초를 받던 형소(형리청)인데 복원이 잘못 이뤄져 중영청 앞 담장 축대 바로 밑에 세워져야 할 건물이 위에 지어져 버렸다. 옛 통영세무서 자리로 지금의 통영시 간창골1길 64다.

또한 형소에서 문초를 받던 신자들을 가두고 교수형을 집행하던 ‘중영옥’(중옥)은 형소와 오른쪽 길 건너편으로 70m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지금의 통영시 향토 역사관 아래에 있는 통제영 관리사무소 앞 공터와 길 주변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통영시 세병로 111로 고증되고 있다.

김일룡 통영문화원장은 “통제영 관리사무소 입구 991.73㎡쯤 되는 공터와 도로변이 바로 김기량 복자가 순교한 중영옥이 자리하고 있던 옥터인데 아직까지는 천주교회의 순교사적 의미를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통제영 증거 터나 순교 터는 현재 향토사적 차원에서만 연구나 조명이 이뤄지고 있을 뿐이어서 앞으로 정확한 고증 작업과 함께 치밀한 교회사적 연구 절실하다. 또한 증거 터나 순교 터에 대한 표석 설치나 증거자나 순교자에 대한 현양 운동 또한 필요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통제영 내 역로청 터에 세워진 마산교구 태평동성당 주임 김길상 신부는 “통제영 관장은 사형 집행 권한을 갖고 있었기에 김기량 복자가 신앙을 증거하고 교수형을 당한 통제영이나 옥터는 중요한 증거 현장이자 순교 터라고 본다”며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앞으로 활발한 연구와 현양 운동이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ㆍ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순례를 마치며…

지난해 5월 11일 자(1264호)로 닻을 올린 ‘124위 순교지를 가다’를 9개월 만에 27회로 마무리한다. 기획은 평화신문 창립 26주년을 맞아 시복을 앞둔 124위의 신앙과 삶을 순교 현장에서 체험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윤의병(바오로 1889~1950?)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처럼 ‘숨은 꽃’이 드러났고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들이 살아간 행적과 올곧은 믿음 살이 순교 비화 새로운 순교ㆍ증거 터도 밝혀졌다. 물론 신앙을 버린 배교자도 있었고 가혹했던 박해자들의 행적도 낱낱이 드러났다. 그랬기에 마치 ‘꽃과도 같은’ 순교 사화를 하나하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취재 여정은 특별한 눈물 특별한 감동을 안겼다. 124위의 시복이 단순한 시복으로만 끝난다면 시복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순교자들의 거룩한 삶과 영웅적 성덕 믿음의 모범을 본받아 내면화하고 그 덕행을 실천하는 순교 신심 현양이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124위 복자들의 삶과 덕행은 고스란히 묻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시복은 복자가 되는 당사자들을 위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오세택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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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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