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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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14)덤으로 받은 삶

하느님께서 사촌 동생 대신 나를 살리신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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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사촌 동생 대신 나를 살리신 이유는…

▲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흥남을 통해 철수해야 했다. 사진은 흥남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피란민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폭음과 함께 잠시 정신을 잃었던 진석이 눈을 떴다. 앞이 뿌옇고 어두웠다. 눈을 비벼봤지만 소용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붕은 뻥 뚫렸고, 서까래는 무너져 있었다. 진석과 사촌 동생이 숨어 있던 집이 폭격을 맞았던 것이다. 역한 화약 냄새와 먼지가 방안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무너진 서까래가 옆에 있던 사촌 동생을 덮친 것이다. 진석은 깜짝 놀라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동생을 불렀다.

“미카엘! 미카엘.”

진석은 대답 없는 사촌 동생에 황망해 하며 작은 목소리로 연거푸 동생을 찾았다. 그러나 미카엘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동생이 있는 쪽으로 간신히 몸을 돌려 살펴보니 그는 복부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 채 숨져 있었다. 진석이 전쟁 중 눈앞에서 목격한 첫 죽음이었다. 잔혹한 전쟁은 가까운 이를 너무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데려갔다.

미카엘이 세상을 떠난 날은 9월 25일이었다. 다음 날이 추석이었고, 달빛이 아주 밝은 밤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함께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던 동생이 이젠 저세상 사람이 되어 아무 말 없이 쓰러져 있는 걸 보니 너무나 허망했다.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있으면 미카엘 천사의 축일이었다. 자신의 축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을 것이라 애써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손 뻗으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던 동생의 죽음은 평생의 슬픔이 됐다.

동생과 자리가 바뀌었다면 분명히 진석이 죽었을 것이다. 19세의 청년 진석은 그날 깨달았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말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 동생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나머지 삶은 덤으로 받아 사는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그리고 왜 하느님은 나를 살려두셨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날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동생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항상 기도한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지만 연합군이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기는 쉽지 않았다. 북한군은 특히 서울 서쪽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서울이 완전히 수복되는 데는 13일이 걸렸다. 그 13일 사이에 긴급 체포된 남한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납북되거나 총살당했다. 연합군도 사력을 다해 서울로 진격을 거듭했다. 북한군은 9월 23일까지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으나, 9월 24일 한미 해병대는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이튿날인 25일 마침내 서울 주변의 고지들을 빼앗았고, 그곳에서 서울 시가를 굽어볼 수 있게 됐다.

공산군은 퇴로가 완전히 봉쇄될 것을 두려워해 서울을 사실상 포기하고 주력부대를 25일부터 의정부 쪽으로 퇴각시키면서 후위 부대로 하여금 저항을 계속하게 했다. 서울 시가 전투는 26일에도 시내 전역에서 계속됐다. 9월 27일 새벽 국군은 중앙청으로 돌입해 태극기를 달았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진석은 연합군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갔다. 동네에 가까이 다가가니 동네가 다 부서져 폐허가 돼 있었다. 동네에서는 미군들이 총을 들고 수색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민가로 숨어든 북한군 패잔병이나 부역자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진석은 장발에다 덥수룩한 수염으로 한눈에 보아도 숨어서 지낸 모습이 역력했다. 미군은 진석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어떤 남자 한 명이 미군에게 붙잡혀 길거리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안면이 있는 동네 사람이었다. 미군은 그 남자가 부역자라고 의심해 계속 묻고 있었는데 영어로 말하니 그 남자는 알아듣질 못해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석이 다가가 그 남자는 부역자가 아니고 우리 동네에 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미군은 힐끗 진석을 보더니 남자를 놓아주고 다른 곳을 수색하러 갔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진석은 자신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여하튼 말이 통했던 것 같다.

“아이고,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 부역자로 끌려가 죽었을 겁니다.”

정신없이 감사 인사를 하고 도망가다시피 집으로 향하는 이를 보자니 진석은 민망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미력이나마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미력한 힘을 당신의 도구로 써주신다는 것을 느꼈다. 진석은 지긋지긋한 3개월의 도피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시 만났다.

북한군이 주둔했던 명동성당도 9월 27일경 신자들의 손에 다시 돌아오게 됐고 장금구 주임신부도 9월 30일 본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용산에 머물던 소신학교 교장 이재현 신부와 교사 백남창 신부, 정진구 신부 등과 천주교 지도급 인사들이 9월 16일 북한군에 피랍됐다. 명동성당도 곳곳이 파괴됐다. 성당에 모셔져 있던 성상들이 부서졌고 제의실에 보관돼 있던 제의들도 찢겨 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자들과 사제들이 힘을 모아 성당을 재건해 나갔다. 10월 22일에는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UN 연합군 환영 미사를 봉헌했고, 11월 21일에는 최익철 신부, 장대익 신부의 사제 서품식이 거행됐다.



서울을 수복한 연합군은 달아나는 북한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연합군은 곧 전쟁이 끝나 고향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거의 섬멸 상태에 이르자 중국 공산당이 한국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갑자기 4개 군 약 50만 명의 병력으로 고원지대를 타고 몰려 내려왔다. 날씨와 지형 등이 유엔군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결국 유엔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아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주로 야간에 이동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하는 등 이른바 인해전술을 펼쳤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곧 전쟁이 끝날 것 같던 한반도에 공포와 죽음의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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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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