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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51) 새천년기를 앞두고

교회 안팎으로 분주한 세기말, 희망찬 대희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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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팎으로 분주한 세기말, 희망찬 대희년 꿈꾸다

▲ 1999년 10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2000년 대희년 맞이 평신도 대회에서 정진석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정진석 대주교는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한 후 거의 매일 사람들을 면담했다. 그는 하루를 마감하며 그날의 일정과 면담한 이들을 꼼꼼히 기록해두곤 했는데, 그가 쓴 일기장에 비어 있는 칸이 없을 정도로 면담과 회의 등 일정이 끝이 없었다. 교구 단체의 입장에서는 새 교구장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이해시키는 한편,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교구장은 바쁠 수밖에 없었다. 정 대주교가 만나는 면담자도 주교, 사제들뿐 아니라 사도직 단체를 맡고 있는 신자 대표들, 그리고 그동안 서울대교구에서 많은 봉사를 해왔던 원로 신자들이 많았다.

거기에다 정부와 사회 기관장들의 인사도 많았다. 때로는 잘 모르는 분야의 사람들도 교구장 면담을 청해 비서실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만큼 서울대교구장의 위치와 중요성이 크다는 방증이었다. 교회 내 인사뿐 아니라 교회 밖의 많은 이들이 서울대교구장과의 만남을 원한 것은 자신들의 문제를 알아주고 또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 밖의 문제에서도 더 이상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 1999년 5월 조계종 총무원장 고산 스님의 예방을 받고 있는 정진석 대주교.서울대교구 제공
 

사람들과의 면담도 면담이지만 각종 회의가 너무 많았다. 모든 회의가 중요한 결정을 하는 자리이므로 정 대주교는 어느 때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용한 청주집에서 살던 처녀가 사람 많고 복잡한 서울집으로 갑자기 시집와서(?) 전혀 다른 수준의 살림을 사는 느낌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회의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정확한 판단을 한다고 해도 교구 행정이 이뤄지는 도중에 합류한 정 대주교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공부하듯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보고서를 여러 번 정독해 흐름을 파악했다. 그리고 보좌 주교들의 이야기나 해당 안건 책임 사제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 정 대주교에게는 우선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모든 회의 때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전체의 실제 분위기나 의견을 알려고 했다. 그러나 회의라는 게 딱딱한 느낌이어서 그런지, 쉽게 자유로운 의견이 나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 대주교는 비서실에 신부들이 교구장을 만나고 싶어 하면 무조건 시간을 잡아두라고 일러두었다. 교구장이 교구 사제를 만나는 것이 첫 번째 사목이란 생각에서였다. 갑자기 혹은 일정이 끝난 저녁에도 연락할 수 있도록 숙소 전화번호도 알려주도록 했다. 언제라도 사제를 만나겠다는 교구장의 의지를 드러냈다.

지나 보니 실제로 일상사나 어려운 점을 미리 이야기하는 사제는 많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이미 문제가 발생한 후에 만나니 면담을 하더라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 대주교는 항상 그런 점이 아쉬웠고 힘들었다. 미리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구장인 자신이 사제들에게 좀 더 다가가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하고 사제들에게 늘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도 정 대주교는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잘 챙겨야 했다. 다행히 청년 시절부터 새벽에 일어나면 한 시간 정도 맨손 체조를 하고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 평생 습관이 돼 있었다. 체조는 학창 시절부터 배운 것을 토대로 정 대주교가 필요한 대로 정해서 하고 있는 체조였다.

세 끼 식사는 가능하면 소식을 하고, 저녁에는 식사 후 묵주기도를 하면서 걷는 운동을 주로 했다. 명동 주교관에서도 가능하면 이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가정에서 웃어른이 아프면 집안이 어두워지고 생기가 없어지는 것처럼 많은 교구, 본당에서도 교구장이나 주임 사제가 아프게 되면 공동체가 휘청이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정 대주교는 공부하고 일하듯이 성실하게 건강을 챙겼다. 혼자 하는 운동과 기도,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는 아주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가능하면 잘 지키려 했다. 아마 평생을 통틀어 이것을 하지 못한 날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크게 마음먹고 정한 것은 그대로 지속해서 행동하는 것이 그의 성정이었다.

그렇게 기묘년(己卯年) 새해의 아침이 밝았다. 1999년 1월 1일, 2000년 대희년 준비 마지막 해였다.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지나온 역사가 2000년이 흐른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미 1994년 11월 10일에 2000년을 대희년으로 지낼 것을 선언하고 1997년부터 3년간을 각각 성자, 성령, 성부의 해로 정해 대희년에 대한 집중적이고 직접적인 준비를 할 것을 권고했다. 1999년은 한 해 남은 2000년 대희년 맞이에 주력해야 하는 해였다. 2000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 인류가 가슴 설레며 새로운 천년기, 2000년을 고대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도 ‘새날 새삶’ 운동을 선포하고 대희년 동참을 적극적으로 권고했다. ‘새날 새삶’ 운동은 신자 전체가 네 가지 구체적인 방향으로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자는 것이었다. 첫째는 우리 각자의 삶을 새롭게 쇄신하자는 것, 두 번째는 각 가정을 참된 가족 공동체로 새롭게 이끌어나가자는 것이고 세 번째는 우리 이웃들이 서로 사랑으로 협조해 나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국민 전체가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사람답게 사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가정과 공동체, 사회로까지 확산하는 실천 방안들을 하나씩 실천해나가고자 했다. 사실 매해 큰 노력 없이도 끊임없이 늘어나던 새 신자는 그 증가세가 한풀 꺾이다 못해 하향 곡선을 그린 지 여러 해가 지나 있었다. 교회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선교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새로운 천년기를 그 계기로 삼아야 했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 1998년 8월 김대중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는 정진석 대주교.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정 대주교에게는 1998년이 개인뿐 아니라 교회 안팎으로도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개인적으로는 생각지도 못하게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했고, 교회 바깥으로는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민주주의에 기초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IMF(국제구제금융) 체제 1년 동안 정리 해고의 바람이 불어 수많은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고 중산층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사람은 희망과 꿈을 안고 2000년 대희년을 고대하고 있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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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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