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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6) 조선 선교를 자원하다

“조선으로 보내달라”며 전교회와 교황청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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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전경.가톨릭평화신문 DB



조선 선교지 관할 여부를 묻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의 공동 회람(1828년 1월 6일자)을 읽은 브뤼기에르 신부는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을 다시 한 번 강하게 느꼈다. 그는 1829년 5월 자신의 대목구장인 플로랑 주교에게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 말을 들은 플로랑 주교는 “신부님께서 조선 선교를 자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며 적극 지지했다. 그러면서 플로랑 주교는 브뤼기에르 신부에게 “교회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성인들의 통공에 동참한다. 이기주의는 세속적인 일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에서도 비난받을 만한 것이다. 어느 한 선교지의 특수한 이익이 교회의 보편적인 이익에 비추어 볼 때 포기해도 잃는 게 적거나 없다면 이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격려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플로랑 주교는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으로 떠날 경우 선교사 부족으로 어려움에 부닥칠 샴대목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보편 교회를 위해 그를 지지한 것이다. 플로랑 주교는 교황청의 명령이 나면 자신의 승인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조선으로 가도 된다고 브뤼기에르 신부에게 허락했다.

플로랑 주교의 지지와 허락을 받은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5월 19일 방콕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에게 조선 선교를 자원한다는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들이 조선 선교 수락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제시한 다섯 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설득했다.

먼저 ‘선교 기금이 없다’는 것에 “우리 신학교에서 일찍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며 어떤 일을 거부한 적이 있었는가?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선교지 가운데 한 군데라도 포기한 일이 있었던가?” 하고 반문하면서 “하느님께서 새로운 재원을 마련해 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선교사가 부족하다’는 어려움에 “선교 회보와 프랑스의 모든 신학교에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면 많은 선교사가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다른 선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는 주장에 “저 불쌍한 조선인들이 당하고 있는 것만큼 급한 일은 없다”면서 “신부 한두 명쯤 줄어든다 해도 우리 선교지 전체로 볼 때에는 그리 큰 공백 상태를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으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부정적 태도에 “몇 해 되지 않는 동안에 여러 편지를 로마에까지 보낼 수 있었던 조선인들이 신부 한 명쯤 자기네 나라에 인도해 들이지 못하겠는가?”라면서 “조선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하느님 섭리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

끝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태도에 “우리 회는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장래에 대한 약속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잠정적으로 한두 명의 신부를 보내겠다고 포교성성에 제의하라”고 청하면서 자신이 “조선에 가겠다”고 자원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지도 신부들에게 교황청에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 달라는 요청도 잊지 않았다.

어떠한 이유로든 조선 선교지를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브뤼기에르 신부의 이 편지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지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물꼬를 텄다. 이 편지는 훗날 조선대목구 설정에 큰 역할을 한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29년 6월 9일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Bartolomeo Alberto Cappellari) 추기경에게 편지를 써서 조선 선교를 자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이 편지에서 “오래전부터 조선 선교의 바람을 키워 왔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 …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 모양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겠으니 저의 성소를 승인하여 출발 명령을 내려달라”고 간청했다.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도 브뤼기에르 주교를 지원하는 편지를 1829년 6월 20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부주교와 헤어지는 것을 받아들였다”면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를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파리외방전교회 공동 회람을 읽고 조선 선교를 열망한 이가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중국 사천대목구 신학교 교수로 있던 로랑 조제프 마리 앵베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 1796~1839) 신부였다. 그는 1819년 12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을 때부터 조선 선교의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공동 회람을 1829년 5월 사천대목구 부대목구장 페레쇼 주교의 집에서 읽었다. 막술라(Maxula)의 명의주교인 페레쇼 주교는 이 회람을 읽고 “만약 이 지방에서 조선으로 첫 선교사를 파견해야 한다면, 그 선교사는 아마도 앵베르 신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앵베르 신부도 “자신이 중국인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은 데다가 말과 글을 알고 있기에 선교 여행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두 달 뒤 사천대목구장인 폰타나 주교도 페레쇼 주교와 똑같은 말을 앵베르 신부에게 했다. 앵베르 신부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오랜 소망에 다시 불을 지폈다.

그리고 믈라카 해협에 있는 풀로-페낭 섬에서 중국인 신학원 교장으로 있던 자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도 조선 선교의 뜻을 품게 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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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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