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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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순교자들] (28·끝) 이재순(요한) 동평학교 교사

순교의 길 걸었으나 휴전선에 시복 진행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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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중 평양교구 순교자는 모두 24위다. 시복 건 제목이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정해졌을 정도로 평양교구 순교자들은 그 비중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평양교구 순교자 가운데서도 안타깝게 시복 대상자에 포함되지 못한 순교자들이 4위나 된다. 이유가 해당 순교자의 생애와 덕행, 순교 사실에 대한 ‘자료 미비’여서 더욱 안타깝다. 그렇다고 시복 추진 대상자 선정위원회를 탓할 수도 없다. 해방 이후 북한은 미수복 지역이어서 시복법정이 개정됐음에도 현장 조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들은 모두 평신도로 신의주본당 이석태(베드로) 회장ㆍ김 모니카 부녀회장 부부, 영유본당 김윤하(시몬) 회장, 평양 대신리본당 이재순(요한) 동평학교 교사 등이다. 연중 기획으로 시작한 ‘평양의 순교자들’ 마지막 회로 이들의 삶과 순교 행적을 조명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자료=평양교구 사무국 제공




청년회 이끌며 교리교육에 심혈

이재순은 1921년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현 황해북도 곡산군)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울대목구 신학생으로, 소신학교 과정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다녔지만, 대신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일본 도쿄 명문사학 죠치대에서 유학했고, 졸업 뒤 평양 성모보통학교 교사를 지냈다.
 

동평양 대신리본당에 부임한 박용옥 신부는 청년회를 활성화하고자 신심이 깊고 투철한 그를 본당으로 불러들여 청년회를 이끌게 했다. 청년들의 구심점이 된 그는 교리 연구와 신심 활동 진작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당의 교리교육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으며, 각종 교회 행사를 직접 계획하고 준비해 진행했다. 성극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 지도했고 때로는 주연을 맡기까지 했다. 자신이 축하곡을 작사·작곡해 본당 신부의 축일에 연주하기도 했고, 능숙한 풍금 연주 솜씨를 보였다. 본당 성가대 지휘를 맡기도 했다.
 

해방 직후에는 대신리본당 부설 동평학교 교사를 하면서 우리 말글을 다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야학을 개설, 청년들과 함께 신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교리문답 책도 우리글로 만들어 가르쳤다. 평양교원대학의 라틴어 강사도 겸직했다. 집안 살림은 가난한 편이었다. 홀어머니와 부인, 두 딸과 함께 청빈하게 살았다. 하지만 가난한 가운데서도 굳은 신앙으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뒤 행방 묘연
 

당시 대신리본당 예수성심회장으로 활동하던 이재순은 월북한 사촌 동생을 만났다가 이 사실을 공산당국에 알리지 않아 간첩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 투옥됐다. 본당에서는 변호사까지 내세우며 구명운동을 했지만, 결국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영생 탄광(「천주교평양교구사」에는 아오지탄광으로 기록돼 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이후 그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대신리본당 청년회에서 그와 친하게 지냈던 김기봉(안드레아) 제6대 평양교구 신우회장의 증언이다.   


*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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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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