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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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현장을 찾아서 (3·끝)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당신은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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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사이에 대학원에 새로 입학했다. 한국체육대 사회체육대학원은 현직에 있으면서 대학원을 다니려는 스포츠 관련 종사자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는, 조금은 특별한 대학원이다. 첫 수업 중에 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패럴림픽을 마친 지금에서야 그 말씀이 마음 한구석에 깊숙하게 남았다.



‘누군가 당신에게 1년 내내 관심과 연락도 없다가 생일에 그것도 저녁이 다 돼서 축하한다고 연락한다면, 당신은 그 축하를 받고 기뻐할 것인가. 서운해 할 것인가.’

관심은 참으로 평범한 듯하지만, 그 특별함은 언제나 끊임없는 노력과 진심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 패럴림픽은 내게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온 시간이었다.

패럴림픽을 시작하기에 앞서, 평창은 따스했다. 눈이 다 녹아내릴 정도였고, 많은 이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개막을 앞두고 다시 온도가 내려가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10㎝ 내외로 내린 눈은 다시금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나의 기다림은 그렇게 시작됐다. 올림픽 때와는 달리 패럴림픽에서는 참가하는 가톨릭 신자 선수 명단조차 없었기 때문에 종교실로 준비된 곳에서 기다리면서 마냥 누군가가 오기를 기도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소리, 휠체어 소리만 나도 내 마음은 두근두근했다. 하지만 첫 미사를 봉헌하고, 첫 선수를 만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며칠 동안 미사 한 번 드리지 못하고 숙소로 향하는 내게 문자가 하나 왔다.

‘아르헨티나 선수 한 명이 내일 오후 4시에 미사를 부탁합니다. 혹시 영어 미사 가능하실지요.’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꼭 드려야 하고, 드리고 싶은 미사였다.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 놓고, 숙소로 달려와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영어 미사 준비였다. 그날의 복음과 독서를 확인하고 영어 미사 통상문을 찾아서 인쇄하고 몇 번씩 통상문을 읽는 연습을 했다.

물론 다음날 영어 미사는 내가 원하는 만큼 매끄럽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불안했던 내게 찾아온 그 선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그 선수는 엔리케 플란테이(Enrique Plantey)라는 아르헨티나 스키 선수였다. 선수촌에 들어온 첫날부터 미사를 보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맞지 않아 이제야 미사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사를 봉헌하고 경기에 나갈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나 역시 그에게 이 미사가 패럴림픽에 처음 참가해 집전한 첫 미사라고 이야기하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오늘 우리처럼 서로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플란테이 선수는 내일 다시 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을 전해왔고, 다른 선수 한 명과 자신의 가족들도 미사 때 함께하기로 했다.

숙소로 오는 길에 또다시 눈이 내렸다. 오스트리아 신부에게 문자가 왔다. 메달을 딴 선수들을 위한 파티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문자와 함께 보내온 사진에는 선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인터뷰하는 한 아나운서가 있었다. 그 여성 아나운서는 10여 년 넘게 장애인 방송만을 전문으로 진행한 사람이고, 그래서 모든 장애인 선수들과 가깝게 지내며 친근한 사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아나운서는 선수들의 메달 소식에 가족처럼 기뻐하고 눈물을 보이곤 한다고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서 다음날 미사를 준비하면서 내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주 명확하게 느꼈다.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 그리고 특별하지 않은 순간에서부터 이어오는 관계.’

이번 패럴림픽은 스포츠 사목을 시작하던 5년 전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기회가 됐다. 패럴림픽 첫 미사를 한 다음 날은 많은 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엔리케 선수들의 가족과 여자친구, 칠레에서 온 산티아고 베가 선수까지. 모두에게 준비한 화관을 씌워주었다. 선수의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

어머니의 눈물을 100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눈물 속에서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지난 시간에 대한 아픔이 담겨있으리라. 이역만리에서 처음 보는 신부와 함께 지내는 미사 속에서 어머니는 조금의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닐까. 아픈 이는 아픈 이로서 위로를 받고, 그를 바라보는 우리는 그들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 내 삶을 살아갈 위로를 받는다.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를 왜 보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제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올림픽과 패럴림픽은 단지 스포츠 게임이나 하나의 경기라기보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의 노력과 과정을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각자의 삶이라는 경기장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선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도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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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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