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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 성월 기획] 특별기고 -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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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는 위령 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위령의 날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억하며 그들이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볼 때 위령 성월이든 위령의 날이든 이는 마치 죽은 이들을 위해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와 가까웠던 이들의 죽음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이기도 합니다. 즉, 위령 성월은 곧 나의 죽음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동안 웰빙(well-being) 열풍이 몰아치다가, 사회가 고령화돼 가는 상황에 발맞춰 웰다잉(well-dying)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웰다잉 운동의 프로그램을 살펴 보면 주로 임종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유서를 써보고, 관에도 들어가보는, 그래서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미리 체험해 보면서 죽음을 좀 더 편안하게 맞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사실 그 자체로 보면 생명을 앗아가는 두려운 사건이며 부정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잘 죽는다는 것이 그 사건을 좀 편안하게 맞이하면 그만인 것인지’ 물어보게 됩니다. 웰다잉이라는 것이 그저 편안한 죽음을 말하는 것인가요?

성 아우구스티노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 앞에서 겪었던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의 부재는 내가 그와 나눴던 모든 것을 하나의 끔찍한 고통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중략) 저는 제 자신에게 거대한 수수께끼가 됐습니다.”(고백록 4권 4장)

가까운 이의 죽음은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왔던 나에게 하나의 경종이 됩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묻게 합니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는 질문이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오늘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질문은 특히 죽은 이들의 영혼과 나의 죽음을 묵상하는 이 시기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물음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삶은 그저 내어던져진 무의미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숙제처럼 다가옵니다. 그저 편안하게 죽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인간의 이해가 답을 주지 못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신앙은 사실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미사 감사기도문)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준비라는 것은 결국 하루 하루 부활의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선종이라는 것은 그렇게 부르심받은 삶에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한 삶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 나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나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위령성월 이 한 달이 오히려 주신 생명에 감사하며 소중한 순간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시길 바랍니다.


박은호 신부(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박은호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6년 사제품을 받고 2016년 이탈리아 로마 성심가톨릭대학교에서 생명윤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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