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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9) 가난

“하느님의 종은 아무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종은 아무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 아시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유물실에 보관돼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도복.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 이상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아시시의 가난뱅이'였다. 가난은 곧 그의 이름이었으며 그의 삶과 영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징이었다. 바오로 사도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듯이,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면서 바로 가난의 삶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그 가난은 '인간의 가난'인 동시에 '신적(神的) 가난'이며, 인간은 성자의 가난 안에서 사랑의 하느님과 일치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특별한 '가난뱅이' 프란치스코

사실 가난이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는 수많은 반교회 이단 청빈운동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그들은 작은 형제들 이상으로 가난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프란치스코를 특별히 '가난뱅이'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가난이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같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가난을 수덕적 행위로 받아들였다. 가난은 본능을 거스르는 고행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욕망에서 이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으로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고 가치였다. 그는 복음에서 드러난 주님의 온 생애를 조망하면서 그분의 비하와 겸손을 드러내는 가난을 직관하고, 그 가난을 형제들이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기를 권고한다.

"형제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돌처럼 당신 얼굴빛 변치 않으셨고'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뿐만 아니라 복되신 동정녀도, 제자들도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으며 동냥으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자께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셨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 프란치스코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가난이다. 바로 이 가난에서부터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직관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한 그의 구체적인 계획이 출발한다. 그는 유언에서 회개 초기의 공동체 생활을 회상하며, 그들이 지켰던 가난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우리 생활을 받아들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또한 안팎으로 기운 수도복 한 벌과 띠와 속옷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이상 더 가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

프란치스코가 귀도 주교와 아시시 시민들 앞에서 세속을 떠날 것을 선언하며 한 첫 번째 행동은 바로 옷을 모두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한테서 받은 의복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난에 옷 벗김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받아들이는 표지였다.

그리고 뒤이어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 카타니의 베드로, 에지디오, 실베스테르 같은 형제들이 그를 찾아와 함께 지내기를 청했을 때, 그들에게 첫 번째로 요청한 것은 바로 재물의 포기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가난하게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그들도 가난하게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를 형제회로 받아들이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절차로서, 법적으로 굳어진다. 형제회에 입회하기를 원하는 이들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유로운 의지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결심을 형제회와 자기 자신에게 증명해 보여야 했다.



인간은 왜 시험에 드나?

때때로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를 기만한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결심과 확고한 듯한 믿음도 약간의 시험에 여지없이 무너지곤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믿음을 끊임없이 시험하신다.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믿음의 실체를 알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물론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복음적 가난'은 이러한 물질적인 재물의 포기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영적인 재산을 포함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 그가 추구하는 가난은 세상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에 대한 열렬한 사랑 때문에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 어떤 일도 못마땅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그 죄를(판단할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로마 2,5 참조) 어떤 일 때문에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은 진정코 아무 소유도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마태 22,21)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결합하는 길이었으며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에 인간이 근본적인 사랑으로 응답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가난은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이 첫 번째로 지켜 나아가야 할 삶의 양식이 되었으며, 작은 형제로 살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사원문 보기]
[평화신문  2017.03.1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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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말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또는 9,1.6-9.13-17.34-38>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0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18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20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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