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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6) 11세기 ⑥ - 시토회 영성

청빈 실천하며 기도하며 일하는 ‘백의(白衣)의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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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렘의 로베르투스(오른쪽)가 클레르보의 성베르나르두스를 시토회에 입회시키는 모습을 그린 성화.

▲ 시토회는 일하며 기도하는 베네딕도회 정신을 따르며 자선과 자급자족의 수도 생활을 추구했다. 기도하며 일하는 시토회 수도자들 모습을 담은 그림.

▲ 시토회 수도자들은 사랑으로 일치하며 하느님을 향한 삶을 추구하는 수도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은 엄률시토회(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회) 수녀들이 기도하는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한 수도원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는 수도 생활을 실천한다고 외부인들이 판단할 수도 있었겠으나, 한 수도원이면서도 각자 독방에서 은수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카르투지오회는 수도회를 수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시대에 은수 생활을 지향했던 일부 수도자들은 은수 생활과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에서 강조했던 공동체를 조화롭게 결합시킨 새로운 수도 생활을 제시했습니다.



청빈한 은수 생활을 추구한 로베르투스

세 번째 새로운 수도회는 몰렘의 로베르투스(Robertus Molesmensis, 1028쯤~1111)가 1098년에 설립한 시토회(Ordo Cisterciensis)였습니다. 샹파뉴(Champagne)의 귀족 가문 출신인 로베르투스는 15세쯤 트루아(Troyes) 근처에 위치한 베네딕도회 무티에 라 셀(Montier-la-Celle)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로베르투스는 수련기를 마치자마자 그곳 수도원 원장이 되었으며, 클뤼니 개혁 정신으로 수도원을 이끌어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1070년 욘(Yonne)에 베네딕도회 토네르의 성 미카엘(Saint-Michel de Tonnerre) 수도원 원장으로 추대되어서 그곳으로 이주했던 로베르투스는 수도자들이 다툼을 일삼고 순명하지 않으면서 수도 생활을 개혁할 의지가 없는 모습을 발견하자 크게 실망하고 이전 수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1072년쯤 토네르의 성 미카엘 수도원 근처 콜란(Collan)에서 은수 생활을 하던 은수자들은 로베르투스에게 함께 은수 생활을 실천하자고 제안했으며,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PP. VII, 재임 1073~1085) 교황에게 로베르투스를 은수자들의 장상이 될 수 있도록 청원했습니다. 결국 은수자들의 청원을 수락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1074년쯤 로베르투스를 은수자들의 지도자로 임명했습니다. 따라서 1075년 로베르투스는 은수자들과 함께 몰렘(Molesme)에 작은 공동체를 설립하고, 클뤼니 수도회와 관련 없으며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수도원을 시작했습니다.

로베르투스의 덕망과 명성 때문에 많은 지원자들이 도움을 주었던 몰렘의 수도원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많은 기부금으로 부유해진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본분을 잊고 나태하게 생활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자는 부류의 수도자들과 극단적인 청빈 생활 속에서 엄격한 은수 생활을 실천하자는 부류의 수도자들이 대립했습니다.

1098년 초 로베르투스는 알베리쿠스(Albericus Cassinensis, ?~1109)와 스테파누스 하르딩(Stephanus Harding, 1059쯤~1134) 및 20여 명의 수도자와 함께 몰렘의 수도원을 떠나 본(Beaune)의 자작(子爵)인 르노(Renaud)가 마련해 준 시토(Cteaux) 계곡에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동시에 청빈한 가운데 은수 생활을 실천하는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몰렘의 수도원은 로베르투스를 무단이탈로 규정하고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재임 1088~1099)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했으며,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교황 사절이자 리옹의 대주교였던 위그(Hugues de Die, 1040~1106)를 통해 로베르투스에게 몰렘의 수도원으로 귀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로베르투스는 몰렘의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수도자들을 지도하며 수도원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에 따라 단순한 수도 생활을 실천한 시토회

1099년 로베르투스가 떠난 시토 수도원은 알베리쿠스를 제2대 수도원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알베리쿠스는 로베르투스가 제시했던 수도원의 이상적인 모습을 현실 안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알베리쿠스는 수도자들에게 더 이상 베네딕도회의 검정색 수도복을 착용하지 말고, 염색하지 않은 천으로 만든 흰색 수도복을 입게 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시토회 수도자들은 ‘백의(白衣)의 수도자’라고 불렸습니다. 알베리쿠스는 수도 생활을 위해서 일하며 기도하라는 베네딕도회 정신을 따랐으며, 자선과 자급자족의 이상적인 삶을 추구했습니다. 알베리쿠스 원장 재임 시절에 교황 파스칼리스 2세(Paschalis PP. II, 재임 1099~1118)는 시토 수도원 설립을 승인하고, 교황권 아래에 두었습니다.

1109년 제3대 수도원장으로 잉글랜드 귀족 가문 출신인 스테파누스 하르딩이 선출되었습니다. 하르딩은 수도 성소의 부족과 재정 궁핍으로 재임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1112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가 30명의 형제와 함께 시토회에 합류하면서부터 여러 곳에 수도원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수도회의 상황도 개선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르딩은 효율적으로 시토회를 운영하기 위하여 일정한 숫자로 구성된 수도원 공동체와 수도회 총원장의 정기적인 방문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하르딩이 작업을 시작하고 수도회가 작성하여 1119년에 칼리스투스 2세 교황(Callistus PP. II, 재임 1119~1124)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수도회 회칙인 「사랑의 헌장(Carta Caritatis)」은 시토회가 추구했던 수도 생활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을 알려주었습니다.

시토회는 수도 생활의 단순성을 강조했습니다. 클뤼니 수도회가 미사 전례와 교회 예술을 화려하게 발전시킨 것에 반하여, 시토회는 전례 거행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켰으며 성당 장식도 아주 수수하게 단순화시켰습니다. 특히 시토회는 문맹자들을 위해 성경 말씀이나 교리 내용을 담아 제작한 성화상들도 단순성을 위하여 최소화하거나 제거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시토회는 과도하게 기부금을 받지 않고, 수도자들 스스로 육체노동을 통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계를 자급자족하고자 했습니다.

시토회는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자 청빈을 실천하면서 농사와 관련된 육체노동을 실천하고 거룩한 독서를 통한 기도 생활을 실천하기 위하여 가능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은수 생활 방식을 포함한 공동체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특히 시토회는 애덕(愛德)을 강조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수도원 안에서 수도 생활을 통하여 사랑으로 일치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다양한 사랑의 발전 단계를 고찰하면서 하느님을 향한 일치를 염원했습니다.



시토회는 설립 35년 만에 수도원이 80개소로 늘어났으며, 설립 55년 만에 343개 수도원으로 확대됐습니다. 단기간에 급속한 외적인 팽창으로 인해 시토회는 클뤼니 수도회와 비슷하게 풍요로워지고 비대해지는 문제점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시토회는 수도자들에게 수도회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수도 생활을 끊임없이 교육함으로써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며 오늘날까지 수도 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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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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