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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3)

동쪽 끝 일본으로 선교의 나침반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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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믈라카 성 바오로 성당 앞에 서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5년 1월 인도 고아에서 남쪽으로 1000㎞ 떨어진 코치로 내려왔다. 코치는 1505년부터 1530년까지 포르투갈령 인도 제국의 수도였다. 왕명으로 인도에 파견된 포르투갈 관리들의 폐해가 도를 넘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너도 훔치니 나도 훔친다”는 식으로 주민들을 착취했다. 참다못한 하비에르는 “그들은 생명의 책에서 이름을 지워야 하고 정의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비에르는 코치에서 배를 타고 코모린 곶을 돌아 인도 동쪽으로 갔다. 나가파티남에서 북쪽으로 300㎞ 더 올라가 밀라포레(현재 첸나이 남부)로 이동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 토마스 사도의 무덤을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동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믈라카’로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가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리와 십계명의 해설서를 그들 말로 펴내고자 했다. 그해 9월에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였던 포르투갈령의 믈라카(현재 말레이시아)로 이동했다. 항해는 위험했다. 폭풍을 만났고 수마트라 근처에서는 해적을 만나기도 했다.

1546년 1월 하비에르는 믈라카에서 배를 타고 말루쿠 제도(현 인도네시아, 티모르섬 북쪽)로 향했다. 말루쿠 제도에는 포르투갈인 정착지가 몇 군데 있었다. 말루쿠 제도에는 육두구, 정향 등 특산 향료들이 많이 자생해 ‘향료 제도’라고도 불렸다.

하비에르는 2월 14일 말루쿠제도 내의 암본섬에 상륙했다. 암본섬은 포르투갈인들이 1512년부터 정착해 살았던 곳이었다. 석 달을 머물렀다. 그는 포르투갈 군인들을 사목했고 7개 촌락을 신자 마을로 만들었다. 이후 그는 암본섬 북쪽 1300㎞ 떨어진 모로섬을 찾아갔다. 신자들은 있었지만 얼마 전 주민들이 사제를 죽였다. 모로섬의 여러 부족 중 타바리족은 사람 죽이길 즐겼다. 더 죽일 사람들이 없으면 처자식을 죽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라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다. 물도 부족했다. 돼지 몇 마리를 제외하곤 가축도 없었다. 지진과 화산 폭발이 잦았고, 비바람이 치면 화산재가 바다로 흘러들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하비에르는 7월 초에 트르나테섬으로 건너갔다. 1512년 프란치스코 세랑이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트르나테섬에서 가까운 히투섬 근처에서 난파됐는데 주민들의 도움으로 뭍에 올랐다. 트르나테의 무슬림 지도자 술탄 아부 라이스는 소문으로 듣던 포르투갈 군대가 도움될까 싶어 트르나테로 데려왔고 그들에게 요새를 짓고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처음부터 포르투갈 사람들은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은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받고도 대가를 내지 않았다. 주민들이 항의하자 폭력으로 대응했다.

하비에르는 트르나테의 포르투갈 요새에 머무는 동안 「사도신경 해설」을 포르투갈어로 썼다. 하비에르는 이 글을 12장으로 나누어 장마다 사도신경 구절 하나하나에 관련 성경 구절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그 구절을 신앙인의 삶에 적용했다. 말루쿠 제도를 떠나기 전에 암본 섬에서 고아에 편지를 썼다. “인도에 새로 온 예수회원 몇 명을 믈라카 제도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하비에르는 1547년 7월 믈라카로 다시 돌아왔다. 하비에르는 여기서 야지로를 만났다. 야지로는 일본 사쓰마국 출신 사무라이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는 중이었다. 일본을 탈출하려던 그는 고향 항구에서 포르투갈 무역선 선장 알바로 바스를 만났고, 야지로의 사정을 들은 바스 선장은 그에게 포르투갈 배에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하지만 야지로는 배를 잘못 타 버리고 말았다. 그가 탄 배의 선장은 하비에르의 친구였던 조르즈 알바리스였다. 알바리스는 야지로를 하비에르에게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바리스의 배가 믈라카에 도착했을 때 하비에르는 이미 몰루카로 떠난 뒤였다. 실망한 야지로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 돌아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중국 연안에 기착하던 중 다른 포르투갈 선장을 만나 하비에르가 믈라카로 다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선장이 야지로를 믈라카로 다시 데려다 줬고, 1547년 12월 마침내 야지로는 하비에르를 만났다.

야지로는 간단한 포르투갈말을 금세 배워 하비에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비에르는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를, 야지로는 일본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에게 “자신이 일본에 가면 일본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듯하냐”고 물었다. 야지로는 “일본 사람들이 당장 세례를 받지는 않겠지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답을 들은 후 무엇보다 하비에르 자신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고 나서 결정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덧붙여 “반 년이 지나지 않아 왕과, 귀족, 그리고 상류 계급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믿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의 말뿐 아니라 일본에 다녀온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그들이 여러 날 일본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정보를 수집했다. 상인들 모두 “하비에르가 일본에 가면 인도에서보다 훨씬 더 하느님을 위한 봉사에 결실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인도인들보다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와 포르투갈 상인들의 말에 동쪽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일본 선교로 구체화했다. 특히 하층민 선교에 치중했던 인도에서의 선교와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의 선교를 구상했다. 하비에르는 일본에 대해 수집한 정보와 그의 선교 구상을 로마에 편지로 알렸다. 12월에 다시 인도로 출항했다.

▲ 김태진 신부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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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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