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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8) 18세기 ⑤ - 독일 가톨릭 영성과 신비체험

올바른 신비체험으로 개인주의 신심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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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이단 사조 때문에 18세기에 유럽의 대부분 나라에서 가톨릭 영성은 얀센주의와 정적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올바른 수덕생활을 강조하고 신비생활을 회피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독일에서 가톨릭 영성은 개신교 경건주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등에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 신심을 극복하기 위해 신비생활을 강조하면서 신비체험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도모하려고 시도했습니다.


▲ 세일러.




애덕 실천과 신비체험을 강조한 성직자 세일러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 오버바이에른(Oberbayern) 출신인 세일러(Johann Michael Sailer, 1751~1832)는 뮌헨(Mnchen)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1770년에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인골슈타트(Ingolstadt)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PP. XIV, 재임 1769~1774)가 칙서 「주님과 구세주(Dominus ac Redemptor)」를 통해 예수회를 해산했지만 세일러는 신학까지 계속 공부하고 1775년에 재속 사제로 서품됐습니다. 세일러는 서품 이후 여러 대학에서 신학 교수로서 활동했으며, 1821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됐다가 1829년 교구장이 됐습니다.

세일러는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해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와해된 가톨릭 신앙과 영성생활의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의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외형주의와 신비체험에 대한 무시 및 성직자의 세속화와 세속적인 주제들이 종교계를 비하하면서 가톨릭교회를 괴롭혔습니다. 따라서 세일러는 고대 철학이나 스콜라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고, 교육학 교리교육학, 설교학, 사목신학 분야에서 다루는 최신 방법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내면적이고 생동감 있으며 실천적인 그리스도교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애덕을 실천하는 신앙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을 통한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경건하고 지성적인 성직자가 되도록 훈련했습니다. 한때 신비체험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이단으로 고발되기도 했지만 종교적인 논쟁을 혐오했으며 교회가 불신앙을 거슬러 경건함을 회복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 괴레스.




신비체험의 본질을 연구한 평신도 신비신학자 괴레스

독일 서부 코블렌츠(Koblenz) 출신인 괴레스(Johann Joseph von Grres, 1776~1848)는 독일 가톨릭교회 평신도 신학자이자 낭만주의 신비신학자였습니다. 젊은 시절 괴레스는 신의 계시가 없어도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 ‘유리(唯理)주의(rationalism)’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학에 심취했으며, 범신론적인 색채를 띤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괴레스는 1819년 작품 활동을 통해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해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요구했고, 이 때문에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결국, 괴레스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burg)로 탈출해 1824년 가톨릭 신자가 됐고, 1827년 뮌헨 대학교에서 교수가 돼 다른 학자들과 모임을 구성해 이끌면서 정기간행물을 통해 유리주의를 가톨릭 교리와 대비해 비판했습니다. 1837년에 쾰른(Kln)교구장이 독일 동북부 프로이센(Preussen) 왕국에 의해 폐위됐을 때, 괴레스는 독일 가톨릭 신자들에게 교회를 수호하라고 격려하면서 독일 가톨릭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괴레스는 당시 대표적인 영성신학자도, 신비신학자도 아니었지만,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신학을 접하고 연구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괴레스는 아그레다의 마리아 데 헤수스(Mara de Jess de greda, 1602~1665)와 같은 중세 신비체험 작가들을 접하면서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의 본질을 철저하게 연구했습니다. 결국 1836~1842년 4권으로 구성된 저서 「그리스도교 신비체험(Die Christliche Mystik)」에서 교회 성인들의 전기물과 함께 가톨릭 신비체험을 설명했습니다. 괴레스는 신비체험을 신적, 자연적, 악마적 세 가지 유형으로 언급하면서 신적 신비체험만이 인간 영혼을 하느님과 일치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일부 후대 신학자들은 괴레스의 신비신학이 감성적이고 환상에 가까우며 초점이 없는 부정확한 개념으로 이뤄졌다고 비판했으나, 괴레스의 신비신학은 독일 가톨릭교회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습니다.



▲ 엠머리히.




성흔과 환시를 체험한 수도자 엠머리히

독일 북서부 코스펠트(Coesfeld) 출신인 엠머리히(Anna Katharina Emmerich, 1774~1824)는 1802년 뒬멘(Dlmen)의 아우구스티노 수녀회 아그네텐베르크(Agnetenberg)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엠머리히는 수도원에서 수도 규칙을 엄격하게 실천했는데, 종종 병을 얻어 고통에 시달렸으며 때로는 황홀경을 체험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생활을 엄격하게 하지 못하던 동료 수도자들은 엠머리히를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18031815) 때 나폴레옹이 건국하고 그의 동생 보나파르트(Jrme Bonaparte, 재위 1807~1813)가 잠시 왕위에 올랐던 베스트팔렌 왕국이 1812년 수도원을 폐쇄하자, 엠머리히는 어느 과부의 집에 머물면서 종교적인 체험을 자주 했습니다.

1813년에 엠머리히는 몸에 성흔(聖痕, stigmata)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는데, 이 성흔은 한동안 지속됐습니다. 주교와 의사들로 구성된 심사단은 그녀의 성흔이 진실하다고 판명했습니다. 엠머리히는 예수님과 대화하거나 환시를 통해 연옥 영혼이나 성삼위를 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엠머리히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브렌타노(Clemens Brentano, 1778~1842)와 교류를 하면서부터였습니다. 브렌타노는 엠머리히가 쓴 묵상서라고 소개하면서 1833년 「우리 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괴로운 고통(Das bittere Leiden unsers Herrn Jesu Christi)」을 출판했으며, 엠머리히의 환시들에 대한 브렌타노의 수집물을 브렌타노 사후에 제3자가 1852년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생애(Leben der heil Jungfrau Maria)」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엠머리히가 직접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불확실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당대 독일 가톨릭교회에 신비체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충분했습니다.



독일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든 계층에서 가졌던 신비생활에 대한 관심은 독일 가톨릭 신자들이 영성생활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가톨릭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에 미약하게나마 기여했습니다. 결국, 영성생활에 대한 독일 가톨릭교회의 관심은 개신교가 활발하던 환경 속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원동력이자 핵심이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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