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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도시](32) 사마리아

사마리아인은 왜 사마리아인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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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는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중부 지방인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던 지역명이다. 북쪽으로는 갈릴래아, 남쪽으로는 유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 지중해가 있고 동쪽으로 요르단 강이 흐른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했을 당시 사마리아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가나안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지에 발판을 마련했으나 이웃 평원이나 골짜기에 있던 가나안의 핵심적 거점들은 다윗왕 시대에 와서야 차지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지역은 요셉의 가문, 곧 에프라임 지파와 므나쎄 분파에게 할당된 곳이었다. 지금의 나불루스 근처에 있던 고대 세켐 지방이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당시에 도로들의 교차점이자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이 세메르에게 은 두 달란트를 주고 매입해 그 산 위에 건축한 성을 산 주인이었던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의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인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1열왕 16,24).

구약 시대에 열두 부족이 가나안 땅을 분할 소유할 때 에프라임족과 므나쎄족이 후에 사마리아 지방이라 불리게 될 부분을 소유하였다. 사울, 다윗, 솔로몬 등의 시대에 남북은 통일돼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 왕이 죽은 뒤 사마리아는 북왕국, 즉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과 갈라지게 됐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수도는 티르자에 있었고 이어 오므리왕 시대에는 당시 세켐에서 사마리아로 옮겨졌다. 북왕국은 대체로 남쪽의 유다 왕국보다 세력이 더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 뒤에 여러 강대국의 입김에 사마리아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잡혼 성행하자 유다인이 사마리아인 멸시

본래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다. 그런데 기원전 722년께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한다. 황제였던 사르곤 2세는 주민 3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열 개 지파가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각지에서 몰려온 이민족을 이주시켜 자리 잡고 살도록 하는 식민지 정책으로 잡혼을 실시했다. 사마리아 지역은 종족 간 피가 섞이게 됐고, 그래서 유다인은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르고 원수지간처럼 지냈다. 이후 유다인은 사마리아인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경멸했다. 유다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조차 말을 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요한 4,8-9).

그러다 기원전 587년 남쪽 유다 왕국도 바빌론에게 멸망하게 된다. 나중에 바빌론에서 본토로 귀환한 유다인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던 무렵부터 유다인과 사마리아인과의 반목과 대립은 더 심해졌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참된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즈루빠벨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사마리아인은 오직 구약 성경의 오경만을 그들의 유일한 경전으로 여기고 세켐이나 그리심 산 중턱 등에 오늘날까지 일부 남아 있다. 현재 사마리아는 요르단의 북서부로 편입돼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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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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