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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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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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중략)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김승희 시 ‘객석에 앉은 여자’)



자포자기(自暴自棄).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포기한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스스로 단념한다는 일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한자를 들여다보면 그 뜻이 더 무겁다. 스스로를 포악하게 해 자신의 삶을 내팽개친다는 말이다. 단순히 단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폭행을 가해 못쓰게 만들어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 사라진 인생, 내팽개쳐진 삶에 대해 그가 혹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핑계를 대는 것뿐이다. 늘 자신의 삶을 핑계에 가둬 버리는 삶은 그래서 꿈과 사랑 모두를 지연시켜 결국 나의 삶을 미래로 유보시킨다. 그녀는 시인의 말처럼 ‘아프다는 핑계’로 없었던 병, 더 깊은 병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렬히 무언가를 희망해 보지 않는,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의 병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은 익숙해져 버린 삶의 문법에 갇혀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수동적으로 그저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하시가이 고지라는 심리학자는 우리의 삶은 무의식이 정하고 이 무의식은 우리의 평상시 언어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언어, 수동적인 태도에 지배됐던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 시작된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돌아서는 시작이다. 할 수 없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 말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망하고 청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면 두 가지 생각을 연이어 하게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온전히 개방된 질문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지닌 인간적 소망을 떠올리고 그것이 이뤄지기를 희망하고 하느님께 청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소망들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게 돼 있다. 내가 청한 나의 승진이, 가족의 건강이, 더 많은 재물이 혹시 사사로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것이 하느님께서 달가워하시는 것인지 되묻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청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 알아차림은 지속적인 소망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결과다. 어쩌면 정성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한다는 것은 소망의 정화과정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의 끝자락에 우리는 소망의 근거나 배경이 되는 매우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참다운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내가 욕구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나열하거나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라는 말에 제한되지 않고 내 소망의 근원인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릴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내가 소망했는데 결국은 하느님의 소망을 묻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현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노력은 나의 노력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소망케 한다. 삶을 미래에 유보시키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꿈과 사랑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소망하게 하는 힘이다. 이 힘은 나의 소망과 두드림이라는 응답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화된 삶이 된다. 성령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고 반문하신 것도 이런 이유다. 우리의 소망이 결국 하느님의 소망과 같아지는 것, 그것이 기도다. 회피된 인생, 무기력한 삶 앞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리는 언어는 결국 기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청하라는 명령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신다. 기도는 하고 싶은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기도하는 법을 물었던 제자들은 이미 ‘청하고 찾고 두드린’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이며, 반대로 필요 이상의 현세적 욕망은 거부돼야 한다.(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들의 궁극적인 소망, 즉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것을 방해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마지막으로 청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다. 이 유혹이란 희망을 저버리게 만드는 부정적 언어와 핑계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우리가 꿈과 희망을 유보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청하고 찾고 두드릴 일이다. 우리에게는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도가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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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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