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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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탐욕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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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지 영감. 어릴 적 읽은 그림책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나눔과 공감이 결핍된 삶, 모든 것을 긁어모아 축적하는 삶의 함정을 분명하게 학습시킨 책이었기에, 스크루지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불길한 운명의 대명사였고, ‘할아버지’보다 ‘영감’이라는 호칭으로 무례하게 불러도 되는 부도덕한 인물이었으며, 미워하고 지탄해도 되는 탐욕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스크루지를 다시 떠올려보니 그의 문제는 재산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윤리·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상실과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리지 못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의 문제는 두려움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한 지성의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심각한 파업상태에 들어간 어떤 기업의 소유주가 서슬 시퍼런 투쟁의 분위기 속에서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지금은 분배할 때가 아니라 기업주에게 더 많은 재화를 모으게 할 때’라고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면서, 정녕 탐욕은 어리석음을 더욱 내재화시키는 도발이고, 그러므로 소유에 대한 집착은 철저히 이성의 문제임을 깨달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근심과 공포,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인색함과 그 두려움의 끝이 어떤 어리석은 종말로 이어지는지, 그 여정을 이성적 통찰과 지혜로 가르쳐줍니다.


■ 복음의 맥락

루카복음은 크게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1~4,13)과 공생활 중(4,14~24,53)의 이야기로 구분되는데 공생활 이야기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아가는 공간적 흐름을 배경으로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9,51~19,28)에 발생하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서서히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 중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군중 가운데에 있던 한 사람이 형제들 간의 유산분쟁에 대하여 의뢰하고, 예수님은 재산과 재물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를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 하느님 앞에 부유하다는 것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루카 12,16)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해보면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가 됩니다. 새 번역 성경이 문장의 주어를 “부유한 사람”으로 본 것에 비해 그리스어 본문은 “땅”을 주어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인간이 그 어떤 노력과 공헌을 다 한다하여도 결과를 내고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심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의 본질적 문제는 창조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앎’이 없으니 당연히 그분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살아온 삶이 문제였습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문장 역시 이러한 사태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17절) “내가 수확한 것”이라는 표현은 수확물의 진정한 주인과 주체가 누구인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드러내줍니다. 결국 그가 받은 ‘은혜’는 ‘재앙’으로 변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주신 은혜를 선물로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음, 은혜의 결과를 하느님의 일을 위해 나누지 못한 탐욕이 비극을 자초한 형벌이 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20절) 이 문장에서도 여전히 주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21절)이 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 허무로다, 허무!

재물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집착이,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라는 복음의 관점은 제1독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첫 문장에 무려 5번이나 등장하는 단어 ‘허무’는 히브리어 ‘헤벨’에 해당하며 ‘숨’, ‘입김’처럼 금방 없어지는 것, 찰나의 것을 의미합니다. 숨이나 입김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지만 중요하다고 해서 이를 부여잡거나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할 때 그 숱한 노력들은 부질없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숨’이 찰나적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찰나적인 것들을 삶의 본질인양 소유하려하고, 하느님의 선물을 자기 것인 양 사용하려하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무”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2,22~23) 코헬렛의 저자는 찰나적이고 잠시적인 것을 영구하게 간직하려는 노력의 무의미함을 지적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모습은 모으고 쌓아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걱정, 지나친 심각함, 지나친 근심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걱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도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 새 인간을 입은 사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촉구하는 것 역시 인간이 마주해야할 모든 현실적 문제들을 불성실하게 혹은 하찮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 공부, 가족, 재산, 건강 모두 삶을 위해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다만 이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추구하라는 것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이를 “새 인간”이라고 표명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9절)

역사를 계급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은 언제나 권력과 계급을, 자본의 축적으로 확보되는 결과물로 인식합니다. 자본의 축적이 힘이 되는 사회는 그것의 분배를 주장하는 노동자 계급과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내포할 수밖에 없고, 이 모든 악순환은 파괴와 선동의 원인이 되어 더욱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불안을 산출합니다. 노동과 헌신의 결과를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하며 누리고, 이를 기꺼이 나누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에 지배당하고 치열한 과정 속에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발생한 여러 범죄들은 도덕과 윤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지만, 사실 도덕과 윤리는 감정보다 이성의 결여로 발생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의심하고 고독해하며 공허가 가슴을 채워 분노하고 혐오하여 스캔들을 낳습니다. 삶의 찰나성과 재물의 소유가 주는 불안을 지혜롭게 간파하여 인색과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나에게 허락된 현실적 가치에 집중하고 감사하는 것,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축복을 누리는 것,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며 확실한 구원의 길입니다. 부의 축적과 소유에 집착하면 급기야 소유의 노예가 되어 결국 소유 당하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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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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