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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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고통과 슬픔,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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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고통이 다가왔을 때, ‘혹시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이 꼭 죄인들만이 아니라, 올바르고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도 닥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많은 종교인은 ‘하느님이 의인(義人)을 시험하거나 교육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내린다’라고 해석한다. 이런 입장은 역사가 매우 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적인 논변의 형태를 갖추며 ‘변신론(辯神論)’으로 발전했다.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 없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을 거쳐 선이 증가되기 때문에 전체의 조화를 위해 악은 불가피하게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모든 고통이야말로 악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는 현대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릴 뿐이다.


변신론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더라도, ‘과연 고통과 슬픔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입장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그 자체로 악인 고통에 대한 정당한 저항


토마스는 고통이 선하거나 악한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그 자체로(secundum se)’와 ‘어떤 다른 것을 전제로(ex suppositione alterius)’, 즉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라는 구분을 기준으로 들여온다. 그는 ‘그 자체로’ 바라본다면 ‘모든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고통을 바라본다면 욕구가 선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판단은 라이프니츠식의 변신론적 주장들이 설 자리를 없애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이 고통을 무조건 없애 버려야만 하는 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고통이나 슬픔도 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악인 고통이 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토마스는 수치스러운 어떤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전제 아래 ‘부끄러움’은 선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잘못된 일이 전제되고, 어떤 이가 현존하는 악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한다면 이는 선한 일이다.(I-II,39,1)



조건에 따라 선도 될 수 있는 고통


토마스는 이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선하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들어간다. 그는 욕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선인 ‘정당한(Honestum) 선’과 사람들이 욕구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길인 ‘유익한(Utile) 선’, 그리고 최종 목적을 즐길 때 느껴지는 ‘편안한(Delectabile) 선’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을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주장과 연결시켜 보자. 가장 먼저 고통이나 슬픔은 ‘정당한 선’일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는 슬픔도 ‘악에 대한 인식과 거부를 포함하는 한에서’ 정당한 선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육체적 고통의 경우, 위험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본성이 피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생명이라는 선을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적 슬픔의 경우, 악에 관한 인식은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를 거부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슬픔도 ‘정당한 선’이 될 수 있다.(I-II,39,2) 이것을 인정한다면, 두 번째로 고통과 슬픔이 다른 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익한 선’이 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고통 그 자체로는 악이지만 특정 조건에서 선 될 수 있어


고통이 유용할 수 있다 해도 고통받는 이와 함께해주길


실제로 서구 사상사 안에서 고통에 대해 죄에 대한 처벌, 사회 안정성 유지 등으로 도구적인 유용성을 인정하려는 해석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토마스는 여기서도 고통 전체보다는 내적인 고통인 슬픔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죄와 같이 피해야만 하는 악에 대한 슬픔이라면 유용하다. 또한 악은 아니더라도 악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이 세상 사물들이 지닌 일시적 좋음에 대한 슬픔은 유용할 수 있다. 더욱이 피해야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은 그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도 유용하다.(I-II,39,3) 그렇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이 고통과 슬픔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어떤 슬픔이나 고통도 인간에게 가장 큰 악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슬픔이나 고통은 진정으로 악인 것에 의해 발생하거나, 실제적으로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발생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그것에 대한 슬픔은 가장 큰 악일 수 없다. 진정으로 악인 것에 대한 슬픔보다 실제적으로 악인 것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음이나 그것을 거부하지 않음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보다 진정한 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아무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할 때 가장 큰 악이 된다.(I-II,39,4) 


고통받는 이를 위로할 때 필요한 감수성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통은 인간이 지닌 초월성을 드러내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조건 하느님을 옹호하는 것은, 자칫 그들의 솔직한 상태나 표현을 억누르거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2차 가해가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 고통 받는 이가 한탄이나 질문을 통해 표현하는 불확실성과 불평을 함께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견딜 수 있도록 곁에 머물러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고통의 심오한 의미가 고통받는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수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고통의 유용성을 과장해서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고통을 당사자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고통이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둔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고통’과 ‘인간의 이기심과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단순히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하느님의 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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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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