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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년 4월 6일 부활절에 찍은 구요비 주교 어머니의 세례식 가족 사진. 어머니(가운데 흰옷) 오른쪽 꼬마가 7세 때의 구 주교다. 맨 오른쪽은 아버지의 친구인 김홍섭(바오로) 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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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년 시절의 구요비 주교 |
사제관 에어컨은 고장 났다. 주교 임명 당일인 6월 28일 저녁, 미사를 마친 구요비 신임 주교는 가톨릭평화방송ㆍ평화신문 등 교계 언론사 기자에게 둘러싸였다. 날씨는 그리 덥지 않았지만, 기자 10여 명이 모인 본당 사제관은 찜통이었다. 선풍기 두 대로 주교와 기자들 모두 땀을 식히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구 주교는 미안해했다. 그는 에어컨이 고장 난 줄도 몰랐다. 절약이 몸에 밴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구요비 주교의 삶을 관통하는 두 열쇳말은 ‘가난’과 ‘겸손’이다. 1981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는 재속 사제회 ‘프라도 사제회’에 입회했다. 이후 오롯이 가난을 실천해 왔고, 늘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사제관 책상에 놓인 우리말, 프랑스어 성경과 필사 노트는 ‘말씀과 함께한 가난한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포이동본당에서 4년 6개월 동안 사목하면서도 늘 가난한 이웃, 어르신들을 찾아가셨어요. 부임하자마자 시작된 가정 방문을 통해 어렵고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돌보셨고, 지역사회 복지 혜택을 받도록 애쓰셨어요. 당신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 축일 때 받으신 선물까지도 노숙인이나 홀몸 노인, 어려운 이웃에게 다 내어주는 사제이셨지요. 말씀 그대로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함께했던 참 목자이셨습니다.”(유병례 안나, 포이동본당 여성총구역장)
구 주교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25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한학을 공부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죠치대(上智大)에 유학해 언론인, 교육자로 산 구동식(안토니오)씨, 모친은 한경란(수산나)씨였다. 형제자매로는 큰 누나 구화사(클라라, 75)씨를 시작으로 구요한(요한, 72)ㆍ요섭(요셉, 70)ㆍ요나(요나, 63)씨가 있다. 구 주교는 4남 1녀 중 넷째다. 신문물을 접하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부친 덕에 자녀들 이름은 ‘평화의 사도’를 줄인 화사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경 등장인물 이름에서 따 지었다.
구 주교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설악면에서 유일한 공소였다. 인근에 성당이 없었기에 구 주교 부친은 부활과 성탄 판공 때면 사제를 모셔다 자신의 집에서 판공을 하고 미사를 봉헌했다. 부친은 6ㆍ25 전쟁 직후엔 고향 설악면에 설악고등공민학교를 설립, 육영에 나섰고 나중에는 소명여중ㆍ고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구 주교가 성소를 느끼게 된 것은 서울 신일고 2학년 재학 시절로, 가세가 기울어 서울 강북구 삼양동 언덕배기 단칸방에 살 때였다. 가난했지만 ‘공부’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던 시기였고, 철학을 통해 완덕에 이르는 사제의 길을 갈망한 시기였다. ‘가난 속에서의 성소’는 구 주교가 훗날 사제가 돼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하는 배경이 됐다.
1971년 서울 대신학교에 들어간 구 주교는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에서 주최한 노동사목 연수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당시 우리나라 노동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체험하게 된다. 혹사당하는 노동자들과 갈수록 피폐해지는 농ㆍ어민들의 현실을 보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가톨릭노동청년회 소속 청년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체험을 하며 구 주교는 사제품을 받자마자 프라도 사제회에 들어갔고, 설립자인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 신부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으려 노력해 왔다.
“신학생 시절, 이웃에 홀로 사시는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움막에 사셨는데, 어느 겨울날 신학생이셨던 구 주교님이 그 어르신을 집에 모셔와 따뜻한 저녁 한 끼를 대접하고 ‘주무시고 가시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어머니는 당연히 반대하셨죠. 낯선 사람을 집안에 들이는 걸 꺼리셨던 거예요. 그 어르신은 결국 움막집으로 가셨는데, 주교님은 ‘어떻게 저 어르신을 그냥 보낼 수 있느냐’며 어머니께 화를 내신 적이 있었어요. 젊은 시절부터 주교님은 늘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사셨지요.”(동생 구요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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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11월 가톨릭 노동청년회 전국 평의회 때 임원들과 함께한 구요비 주교. 구요비 주교 제공 |
구 주교는 사제로 산 37년 동안 한결같이 누구에게나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사제였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된 존재이기에 인간은 누구나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해 왔고 그 신념대로 살았다. 사제의 역할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구 주교는 두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해 왔다. 가톨릭노동청년회, 노동장년회 담당 사제로 살 때뿐 아니라 구로1동(현 구로2동)본당 등에서 본당 사목을 하면서도 노동사목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제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가난한 노동자들과 파업 현장에서 동고동락했던 구로1동본당 주임 시절을 꼽기도 했다.
프라도 사제회원인 정월기(서울대교구 광장동본당 주임) 신부는 “구요비 주교님은 한 마디로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라며 “가톨릭노동청년회와 노동장년회 담당 사제로 사시면서 그들이 가정과 일터에서 예수님 사랑의 전달자가 되도록 이끄셨던 게 특히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구 주교는 특히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프라도 사제회 한국지부 책임자로 있으면서 2009년 자립 프라도 승격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 한국 프라도 사제회가 한국 진출 40년 만인 2015년 5월 ‘자립 프라도’로 승인받는 데 초석을 놓았다.
이처럼 가난과 겸손의 성덕으로 살아온 삶이기에 구 주교의 일상은 기도나 성체조배 등이 중심이다. 골프도 외면하고 인근 구룡산 등반이나 양재천 걷기로 건강을 다졌다. 취미라면 서예가 강포 김상용(스테파노) 선생에게 배운 서예가 있다. 예서(隸書)와 해서(楷書)를 주로 썼고 독서나 클래식 음악도 꽤 좋아하는 편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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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년 2월 사제서품식에서 선배 사제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구 주교. 구요비 주교 제공 |
구요비 주교 약력1951. 경기 가평 출생
1981. 2 사제 수품
1981~1982 이문동본당 보좌
1982~1983 신당동본당 보좌
1982~1983 겸) 서울대교구 북부지구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지도신부
1983~1986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
(노동사목)
1986~1998 프라도사제회 한국지부 대표
1986~1991 구로1동본당(현 구로2동) 주임
1991~1992 겸) 가톨릭노동장년회(CWM)
지도신부
1991~1993 상계동본당 주임
1993~1998 가톨릭노동청년회(현 YCW)
전국 지도신부
1993~1998 겸) 서울대교구 노동사목
위원회 위원
1998~2000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교
석사(영성신학)
2000~2002 종로본당 주임
2002~2009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영성 지도 신부
2006~2012 프라도사제회 한국지부 대표
2007~2013 프라도사제회 국제평의회
위원
2013. 2~현재 포이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