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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선 무슨 일이?

안중근 애국의 날 / 민족의 운명 앞에 그는 거침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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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던 당시 모습을 재현한 그림.
 

▲ 6시30분

1909년 10월 26일 새벽. 서른 살 청년 안중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날 하얼빈에 도착,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지형을 익히고 동지 김성백의 집에서 묵은 뒤였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부디 거사의 성공을 축복해 주십시오. 2000만 우리 동포들의 원수를 처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침식사를 마친 그는 새 옷을 낡은 양복으로 갈아입고, 브라우닝 8연발 권총을 꺼내 오른쪽 속주머니에 넣었다.

▲ 7시

안중근이 마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일본은 자국 환영객들의 출입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며 러시아 당국의 검문 요구를 거절했다. 안중근도 별다른 제지나 검색 없이 일본인처럼 당당하게 환영식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었다.

정거장에는 러시아 고관들과 군인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플랫폼이 보이는 역 구내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켜 마셨다.

▲ 9시

역전은 러시아 경위병, 각국 영사단, 일본인 환영인파 등 수천 명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9시15분께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초록색의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으로 서서히 들어섰다. 군악대의 환영곡이 울려 퍼지고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9시30분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다. 각국 사절의 영접을 받으며 인사를 나눈 이토는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기 위해 우측에서 좌측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안중근도 찻집을 나와 플랫폼으로 나섰다.

주머니 속 권총을 틀어잡은 그의 손에 땀이 배었다. 의장대 뒤로 바짝 붙어 선 그의 앞으로 이토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중근과 이토의 거리가 10보 정도로 다가왔다. 안중근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권총을 뽑아 들고 사격했다.

탕 탕 탕.

이어 네 번의 총성이 다시 올렸다.

탕 탕 탕 탕.

첫 세 발의 총탄에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절명했다.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의 총알에는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일본 총영사 등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총을 내던진 안중근은 큰 소리로 세 번 외쳤다.

“코레야 우라, 코레야 우라, 코레야 우라”(러시아어로 ‘대한만세’란 뜻)

세계를 격동시킨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안중근은 그 즉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됐다. 그는 포박을 당하는 순간에도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 11시30분

이토 히로부미의 시체를 실은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을 빠져나갔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구내 헌병대 파출소로 끌려가 밤 9시까지 취조를 받았다. 이후 화위안지에 소재 일본 총영사관으로 이송돼 지하 감옥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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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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