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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미미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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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랬어/ 다 뭐든지 늦었어/ 뭐든 빨리 깨닫지 못했던 나….’ 가수 윤종신의 노래 ‘Slow Starter’의 도입부입니다. 노래 제목처럼 제가 바로 Slow Starter(시동이 늦게 걸리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보직을 받거나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보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립니다. 시작을 망설이고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을 사귀는 것도 시작이 어렵습니다. 좋게 얘기하면 신중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조종사가 되는 과정도 그랬습니다. 1985년 10월 28일!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으로 조종석에 앉았지요. 조종사가 되고 싶은 욕망은 강하지만 서툴렀습니다. 2주간의 가입교 기간이 끝나면 30는 강제 퇴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지만 센스는 턱없이 부족했지요. 정신없이 2주를 보낸 토요일 아침, 퇴교자 명단이 발표됐는데 다행스럽게 저는 없었습니다. 후일 들은 얘기로는 담당교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가까스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비행훈련은 순조로웠습니다.

조종사 시절 초반에도 적응이 늦었습니다. 한 번은 장마철에 여주지역으로 훈련장 정찰을 나갔습니다. 복귀 중 이천 상공에서 세찬 소나기를 만났지요. 쏟아지는 빗줄기에 시정(視程)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이러다 추락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그때 정조종사가 빨리 와이퍼를 작동시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당황한 나머지 즉시 스위치를 찾지 못하고 더듬거렸습니다. 정조종사가 급한 마음에 잠시 조종간을 놓고 와이퍼를 작동시켰지요.

그렇게 어리바리하게 시작했지만 비행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됐습니다. 거친 분들(?)과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소중한 경험을 축적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장교로서는 아주 짧은 기간인 6년 만에 교관조종사가 됐습니다. 이후 교관조종사로서 공중강습작전, 화물공수, 산불진화 등 난이도 높은 임무를 수행하며, 2560시간의 비행시간을 기록했지요. 전역을 앞두고 마지막 비행을 할 때는 감격스러웠습니다. ‘조종간을 놓는 순간까지 안전 비행하는 조종사가 가장 훌륭한 조종사’라는 교관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자네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욥기 8,7) Slow Starter인 제가 특히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실수를 할 때마다 이 말씀을 떠올리며 위로와 용기를 얻곤 했지요. 하느님께서는 이런 부족한 저를 묘한 방법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빛을 주셨으며, 절망의 나락에서 손을 잡아주셨지요. 아직도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번창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노력하는 신앙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 동서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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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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