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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 성지순례] 〈42·끝〉 원산대목구 영흥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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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서 1933년 사이 함경남도 영흥군에서만 550명이 세례를 받았다. 당시 영흥본당 총 신자 수가 700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폭발적인 신자 증가가 이뤄졌는지 금세 알 수 있다.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선교사들은 한참 뒤에야 19세기 중엽 영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영흥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866년 말 병인박해 당시 영흥에서만 72명이 함흥으로 압송돼 참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1864년 11월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영흥을 방문, 어른 13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증언도 같이 들었다. 그로부터 60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외교인으로 살던 순교자 후손들의 마음속엔 조상들의 가톨릭 신앙에 대한 향수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 향수가 폭발적인 신자 증가를 가져온 원인이 됐다.

1931년 12월 8일 그레고리오 슈테거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 영흥본당이 설정되자 이들 순교자의 후손들이 대거 입교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성당 신축은 1932년 여름에 시작됐다. 성당 신축은 예상보다 일찍 마무리돼 그해 11월 27일에 봉헌됐다. 당시까지 그렇게 빠르게 지어진 성당은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성당 신축 과정에서 찾아온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의 일자리 구걸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보름마다 일꾼을 교체해 가며 공사를 강행한 덕에 성당 공사를 일찍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엔화 폭락으로 길이 25m에 폭 9m의 성당 공사비를 6000마르크로 줄인 것도 빠르게 성당을 신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성당 신축 뒤 선교 양상은 달라졌다. 학교도 새로 짓게 됐고, 수업을 통해 교리를 가르치고 계몽도 병행하면서 가톨릭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슈테거 신부는 1941년 덕원수도원이 보이론연합회 일본 도노가오카 수도원을 인수하면서 일본에 일시 머무른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영흥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이어 슈테거 신부가 1950년 10월 공산주의자들에게 중범죄자로 몰려 처형되면서 영흥본당 또한 침묵의 교회가 됐다.

눈 덮인 영흥성당은 일제 강점기 중 20여 년간 함남 영흥군 일대에서 선교의 꽃을 피운 영흥 공동체의 빛나는 복음화 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준다.



※이승구ㆍ조명혜 부부의 펜화 성지순례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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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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