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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 신부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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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출신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사제인 한스 큉(Hans K?ng·사진) 신부가 4월 7일(현지시각) 독일 튀빙겐 자택에서 선종했다. 향년 93세.

그는 20세기 후반 카를 라너(Karl Rahner, 1904~1984)와 에드워드 스힐벡스(Edward Schillebeeckx, 1914~2009) 등과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동시에 교회 안팎에서 가장 큰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기도 했다.

큉 신부는 1928년 스위스 수르제에서 태어나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고 1954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어 파리 소르본느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스위스로 돌아와 잠시 보좌신부 기간을 지낸 후 1960년 독일 튀빙겐대학교 가톨릭 신학부 교수로 초빙됐다.

그는 1960년대 초 신학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후해 가톨릭 신학계에서 관심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63년부터는 튀빙겐대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64년에는 교회일치신학연구소 소장직을 겸했다.

이후 그는 수십 년 동안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를 망라하는 광범위한 신학적 연구를 수행하면서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집필했다. 하지만 그는 열정적인 신학 연구 외에, 교황 무류권에 대한 비판으로 교회 교도권과 마찰을 빚어 가톨릭 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하는 등 논란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이미 1967년 그의 교회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데 이어 1970년대 들어서 교황청과 큉 신부의 교황 무류권에 대한 논쟁이 본격화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즉위한 이듬해인 1979년, 신앙교리성은 그가 가톨릭 교리에서 멀어졌고, “더 이상 가톨릭 신학자로 간주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고 선언했다. 다만 사제직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에 따라 그는 가톨릭 신학부가 아니라 총장 직속 교회일치신학 교수로서 교회일치신학연구소 소장직을 계속 유지하면서 세계 종교 문제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 종교들에 대한 연구와 함께 종교간 대화와 ‘세계 윤리’ 문제에 천착했다.

“종교 대화 없이 종교 평화 없으며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그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인류 전체를 위한 윤리가 시급하다고 봤다. 이를 위해 세계 종교들의 연구와 종교간 대화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 대해 연구하고 그 결과를 내놓았다. 또한 ‘세계 윤리’의 구상과 실현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큉 신부는 열정과 논쟁의 신학자로, 교도권과의 잦은 갈등과 충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에 대한 충성과 헌신은 참된 것으로 평가된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4월 7일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지와의 인터뷰에서 큉 신부는 “교회의 정통 교리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학을 ‘발명’한 신학자”라면서 “그는 분명히, 교회 쇄신을 열망하고 구현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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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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