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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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황홀함 / 김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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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청아한 밤하늘에 휘영청 달뜨는 보름밤이면 문원당(세컨하우스) 가까이 자리한 남애항 바닷가 바위산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월출을 기다리고 맞으며 황홀함에 들뜨곤 했습니다. 새삼 선명하게 떠오르는 추억의 달뜨는 밤바다를 그려보며 달려갔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후 지금쯤은 보름달이 얼굴을 내 밀었으리라 예상하면서 동녘 문을 열었더니 시야에 온 세상이 하얗게 와 꽂혔습니다. 잘못 보았나싶어 바깥 조명등을 켜고 보니 그새 제법 쌓인 눈 위로 목화송이 같은 함박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는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겨울 내내 뽀송하게 매 말랐던 대지 위를 덮으며 내리는 함박눈은 더욱 반갑고 운치 있는 황홀한 손님이었습니다. 깊어가는 눈 내리는 밤, 은근히 내일 아침의 설경이 기대가 되며 설레기도 했습니다. 눈 내리는 날은 거지가 빨래하는 날이라는 말처럼 기온이 아주 포근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명이 쪽 눈을 뜨면서 서서히 한지 창살이 밝아왔고, 급히 일어나 앞마당으로 향한 문을 여는 순간 “아아흐!” 살아 꿈틀대는 설국 천국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말을 잊었습니다.

왕대나무와 적송, 그 속에 우뚝 선 주목나무 위와 그리고 배룡나무에 소복하게 쌓인 설경위로 아침햇살이 솔가지 끝에서부터 내려와 조명처럼 비추니 마치 그랜드캐니언의 홍석을 마당에 모셔 놓은 것 같았습니다. ‘환상의 실루엣’. 바로 이런 전경을 이름 하여 황홀경이라는 언어가 태동했나봅니다. 내 집 문원당 마당에서 오직 우리 두 부부에게만 연출해 주신 특별한 은총에 창조주의 권능을 찬미하며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똑같은 이 순간이 다시없을,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을 천국이 이 아침 이 순간 내 집 마당에 펼쳐진 것입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동쪽으로 확 트이게 앉은 대문을 내다보니 쌓인 눈 위로 작은댁에서 군불 지피는 아침 굴뚝연기가 모락모락, 눈밭위에 한 폭의 수채화이며 고향의 노래였고 온 산과 들이 설경으로 무아지경이었습니다. 황홀경이란, 한 가지 사물에 마음이나 시선이 혹하여 달 뜬 경지나 지경이라고 합니다. 너무도 진귀하고 황홀한 전경을 보느라 마루에서 콩당거리다가 겨우 사진만 찍고 잽싸게 영상에 담아 두지 못한 아둔함을 아쉬워했습니다.

한낮이 되니 따사로운 햇살에 나무마다 목화송이처럼 쌓였던 눈송이들이 다 녹아 내려 그 황홀했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마치 우리 삶의 모습들처럼 말입니다. 대자연에서 보고 듣고 얻는 황홀함은 헤아릴 수도 없지만 일상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황홀함을 많이 보고 듣고 느끼며 삽니다. 그것은 신이 주신 은총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의 음률과 아가의 옹알이 웃음소리, 달콤한 곶감을 먹을 때나 입맛에 맞아 사르르 녹는 음식을 먹는 맛으로도 황홀함을 느끼고 기쁨과 즐거움, 진정한 사랑과 감사와 성취감에서도 황홀함에 침몰됩니다. 때로는 꿈속에서도 황홀함을 맛보며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황홀함이 들어 있고 빛, 소리, 냄새, 맛, 시야에 와 꼽히는 햇살, 눈 덮인 대밭 속에서 재잘대는 새소리와 청량한 공기의 맛,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와 나무 냄새를 맡을 때도 황홀해집니다.

이렇게 가끔씩 벅찬 황홀함들이 찌들은 세포를 청정케 해 그 에너지로 토닥토닥 살아갑니다. 주님 주신 삶 안에서 찬란하고 진귀한 기회가 많이 주어졌겠지만 그 순간들을 놓치며 삽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황홀한 것들을 보여 주고 접하게 해 주어도 그 은총을 보고 느끼지 못하면 허상의 삶입니다. 지금 나는 황홀함에 대하여 써내려 가는 이 순간도 내내 황홀하고 행복합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계남(아녜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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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1-12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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