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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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묵주알 돌리시는 어머니 / 박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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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지금 이곳 오월의 숲에선 단내가 나요. 몸속의 젖을 짜내 우리에게 주시던 어머니의 달디 단 향내처럼 은밀하게 코끝을 적셔 옵니다. 아파트 산책로 너머로 넝쿨 장미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오는 이 저녁, 숨 가쁘게 달려온 오늘 하루에 잠시 쉼표를 찍고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또 오월 속으로 떠나가신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37년 전, 아버지가 가시던 그날도 울타리마다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지요. 건강하시다고 믿었던 아버지의 위암 말기 판정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어요. 충격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너무도 빨리 임종을 맞으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기신 선물은 너무도 큰 은총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서둘러 대세를 받으시고 남은 가족들에게 성당에 나가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편안히 눈을 감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오월의 장미 향 속에서 아른거립니다. 남아 있는 우리에게 슬픔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당신의 빈자리에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으로 채워 주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시고 곧바로 어머니와 자식들 손자 손녀까지 모두 세례를 받았지요. 부엌 한 쪽에 모셔져 있던 조항신 정화수 그릇이 자취를 감춘 것도 그쯤이었고요.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지극 정성으로 모시던 점집을 끊고 아침마다 정화수 떠놓고 빌던 당신의 기도가 성모님께 올리는 묵주기도로 바뀐 지 34년, 구순이 지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이면 정갈하게 몸을 씻고 촛불을 켜셨지요. 결혼을 하고 집에 갈 적마다 새벽녘 희미한 불빛에 잠이 깨면 어머니의 둥그렇게 굽은 등이 성모님 곁에서 묵주알처럼 빛나고 있었어요. 한결같은 당신의 그 기도 덕분에 다섯 자식들이 성실하고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그때보다 지금 더 절실하게 느낍니다.

어머니 떠나신지 벌써 네 해가 되었네요. 나는 아직도 ‘어머니!’라고 부르면 가슴으로 눈물 같은 별이 뜹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별나라 마당에 피어 있는 장미 몇 송이 꺾어 맑은 물 채워 넣은 투명한 유리잔에 꽂아 놓고 떠나실 때 넣어 드렸던 손때 묻은 향나무 묵주알 돌리며 기도 하셨겠지요. 다섯 자식의 손자, 손녀 이름까지 엮어 구부러진 허리 묵주알처럼 둥글게 말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부르는 소리 가슴으로 들려요.

어머니, 나흘 전 아버지 기일에 아버지 손잡고 다녀가셨나요. 마당의 장미꽃도 한아름 꺾어 꽂아 놓았어요. 이번엔 특별히 할아버지 상도 따로 차렸어요. 손 큰 며느리가 푸짐한 음식으로 거하게 차렸어요. 어머니가 보셨으면 “에미야 다음엔 힘들게 상 두 개 차리지 말고 할아버지랑 겸상으로 차리거라”하셨을 거라며 웃었어요. 다음 번 아버지 기일에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랑 정답게 함께 오세요.

어머니, 그곳에서도 어머니가 만든 별난 청국장을 이웃들에게 돌리고, 막걸리에 바락바락 주물러 씻어내 새콤달콤하게 무친 홍어회도 오래된 과일주랑 곁들여 나눠 드시나요. 푸짐하고 따사한 인심을 그곳 별나라 이웃들에게도 나눠주고 계시겠지요.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밥은 먹었냐고 예전처럼 그렇게 제 안부 전화 한 번만 해주실 수 없나요. 그 목소리 그리워 창문 넘어 들어온 바람의 향기에 눈시울 적시는 저녁입니다. 어머니와 모든 이들을 위해 오늘 밤 성모님께 묵주 꽃다발 한 아름 바치렵니다. 잘 계세요.


2021년 봄날에 둘째 딸 베로니카 올림.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경옥(베로니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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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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