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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정전을 넘어서 / 강주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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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9일, 30여만 명의 중국군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6ㆍ25전쟁은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속전속결’을 호언했던 김일성이 미군의 신속한 개입 의지를 간과했던 것처럼, 중국의 참전 의지를 무시했던 맥아더의 희망도 빗나간 것이다. 6ㆍ25전쟁은 이제 어느 편도 쉽게 이길 수 없는 전쟁으로 변했다.

양쪽 다 승리를 자신했던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휴전에 대한 논의는 일찌감치 시작됐다. 중국군 개입 이후 휴전을 지지하는 유엔 차원의 노력도 본격화됐는데, 1950년 12월 14일 유엔총회에서 3개국 협상단(인도·이란·캐나다) 구성안이 통과됐고, 1951년 3월에는 ‘현 상태의 정전, 휴전기간 중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 외국군의 단계적 철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전 결의안이 다시 유엔에 상정돼 채택된 바가 있었다.

이처럼 또 다시 세계대전을 치를 수 없다는 국제여론의 압력도 작용했지만, 미국 내의 반전(反戰) 여론도 한반도에서의 휴전을 현실화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갤럽 조사에서는 미국 국민의 65%가 남한을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여론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51년 1월에는 미국인 중 66%가 한국에서의 철수를 원했고, 49%가 한국전 개입이 실수였다는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휴전회담은 소련이 제의하고 미국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소련은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의 유엔방송을 통해 1951년 6월 23일 휴전협상을 제의했고, 7월 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 본회담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휴전 회담은 2년이 넘게 이어졌는데, 권력자들이 주장을 고집했던 회담 중에도 수없이 많은 생명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1953년 7월 27일에 맺어진 ‘정전협정’은 단순히 전투를 중지하는 차원의 ‘군사정전협정’이었다. 당시 회담 당사자였던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은 협정문에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3개월 내’에 ‘정치회담’을 소집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전쟁을 마무리하는 정치적인 협상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전쟁을 시작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 중지를 협상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우리는 이 ‘오래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아직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전쟁은 “결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길이 아니며, 지금껏 한 번도 그러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평화로는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는다”(「간추린 사회교리」 497항 참조)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하자.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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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7-2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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