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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교구 지정 순례지 탐방] (15)죽산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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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에 한 옛날에 천주학 신봉자들/ 산산이 찢겨지고 뼈골이 부서져도/은공의 주님 사랑 세세에 전하고자/ 수없는 고통 속에 목숨을 사루었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에 자리한 죽산순교성지(전담 이해윤 신부) 입구에 들어서면 지난 2007년 순교자 성월에 이정운 몬시뇰(원로사목자)이 남긴 글을 마주할 수 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이었던 지리적 조건으로 조선시대부터 일찍이 도호부가 설치되었던 이곳. 태종 시대에는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고을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도성 수호의 주요 전략지로 이해돼 1595년 도호부로 승격됐다. 이후 인조는 죽산 도호부사가 수어후영장과 토포사를 겸하게 했다. 영장은 지방 주둔 군대의 수장 역할을 했고, 토포사는 도적을 잡는 책임이 있었다. 이 두 가지를 겸하는 죽산 도호부사의 군사력은 막강할 수밖에 없었고, 여주나 이천, 용인, 안성 등지 포졸을 동원할 수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 천주교인들을 많이 체포할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끌려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자들은 혹독한 심문과 고문 속에 죽어갔다. 죽산 이외에도 양지, 용인, 성남, 음성, 직산 등 인근 지역에서 신자들이 체포됐다. 신자들은 도호부가 있었던 지금의 죽산면사무소 자리 옥사에서 고문을 당한 후 현재 성지 자리에서 처형당했다. 죽산 포교에게 체포돼 수원에서 순교한 사례들도 있다. 「치명일기」와 「병인치명사적」,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에서 이름이 밝혀진 이들만 24명이다.

그러나 ‘오가작통’을 통해 신자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알려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들의 죽음도 꽤 많았을 것이다. ‘순교의 사형장’ 죽산에서 죽는 순간까지 이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하느님 나라였다.

그만큼 순교한 이들의 사연도 많다. 60세에 교수형으로 숨을 거둔 여기중은 3대가 한자리에서 순교했다.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1868년 충청도 진천 절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죽산 관아로 잡혀와 순교한 복자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도 그런 경우다.

조선의 국법상 아무리 중죄인일지라도 부자(父子)를, 한 가족을 한날한시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은 금지 사항이었음에도 죽산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자행됐다.

또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든 김 도미니코 가족의 경우, 신자인 사실을 알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열일곱 된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불러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딸을 데려간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자들은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모욕과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인 죽산순교성지 일대는 ‘잊은터’로 불렸다.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해서 붙여졌다. 원래 이름은 ‘이진(夷陣)터’였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을 치기 위해 진을 쳤던 곳에서 유래됐다.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란 뜻이다. 이후 오랑캐 피로 더럽혀진 곳이기에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됐고, 조선시대에는 죄인들 사형터로 사용됐다.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의 목숨이 스러지는 장소가 되며 바뀐 ‘잊은터’의 이름에는 그처럼 순교의 처절함이 배어있다.

성지 주변 ‘두둘기’라는 곳에도 신앙 선조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행정구역상 안성시 삼죽면 덕산리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박해 당시 작은 주막거리였던 이 장소는 신자들을 잡아가던 포졸들이 쉬어가던 곳이라 한다. 여기에서 포졸들은 신자들을 두들겨 때리며 돈을 요구했다. 잡힌 신자들은 두들겨 맞고, 뒤쫓아 온 가족들은 맞는 광경을 목격하며 땅을 두드리며 애통해했다.

죽산에서는 박해 이후 공소가 세워진 1932년까지 단 한 명의 신자도 없었다. 오랫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순교지는 1992년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개발이 착수됐다. 마침내 1994년 강정근 신부(휴양)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면서 성역화 작업은 박차를 가했다.

성지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성체·성모·순교자 신심 고양을 위해 노력했다. 성지 문에 들어서면 광장을 가로질러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한 순교자 묘역과 그 양쪽에 날개처럼 자리한 순교자 현양탑이 눈에 들어온다. 광장에는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커다란 돌 묵주알들이 놓여있다.

순교자 묘역에는 한치수 프란치스코, 김 도미니코, 여정문 일가 등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가 좌우 12기씩 모셔져 있다. 그 바로 위에는 십자가상이 조성돼 있고 십자가의 길이 마련돼 있다. 한 처 한 처 기도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순교자들의 주님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 더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지난 2013년 교구는 성지 옆에 영성관을 완공해 축복식을 거행했다. 평신도 봉사자 양성 공간으로 지어진 영성관은 아울러 교구민들이 순교자들을 본받아 신앙 성숙을 도모하는 장소다.

이해윤 신부는 성지를 찾는 이들에게 ‘신독’(愼獨)을 강조했다. 9월 성지 회보를 통해 이 신부는 “‘스스로를 삼간다’는 신독은 신앙 선조들에게 있어 신앙적 수덕 형태로 발전되고 실천돼 왔는데, 즉 홀로 있을 때라도 늘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신앙적 의미가 깊이 새겨져 있다”며 “코로나19 시기 우리 신앙 선조들의 신독을 일상 안에서 함께 배우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의 031-676-6701 죽산순교성지 사무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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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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