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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교구 지정 순례지 탐방] (17)왕림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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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등이’라 불리던 교우촌이 있었다. 교회 기록에는 1839년 앵베르 주교 서한에 처음 언급된 이후 1888년 갓등이본당(왕림본당)이 설립될 때까지 교우촌(공소) 이름으로 ‘갓등이’가 계속 나온다.

이렇게 볼 때 박해기에 ‘갓등이’는 교우촌 왕림마을을 가리킬 때 별칭으로 사용된 듯하다. 갓등은 ‘갓을 쓴 등불’이란 뜻으로 박해시대 왕림 신자들이 사제들을 지칭한 은어였다.

지난해 11월 29일 교구 순례사적지로 선포된 제1대리구 왕림본당(주임 박전동 신부)은 그 명칭 안에서도 이처럼 신앙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갓등이 지역은 대로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주변지역으로 이동하기 쉬운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때문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일구는데 적합했다. 선교사들도 신자 방문과 성사 집전을 하는 데 있어 안전을 기할 수 있었다. 갓등이라는 이름의 배경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갓등이 신앙공동체 형성은 민극가(스테파노) 성인의 활동 이력을 따라가 보면 1820년대 중반 무렵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성인은 서울에 살다가 1828~1829년 경 갓등이에 와서 6~7년 동안 교리를 가르쳤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갓등이 마을이 있었고 교우촌도 구성됐을 것이다.

살펴볼 것은 최경환 성인의 아들 최 베드로의 증언이다. 민극가 성인이 갓등이에 거주하며 강원도 김성에 있던 최경환 가족을 찾아와 최 베드로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성인과 어린 최양업 신부와의 만남이 그려지는 대목이다.

민극가 성인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와 증거자가 배출된 것은 이런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갓등이와 연관이 있는 순교자와 증거자는 8명으로 꼽힌다. 갓등이를 방문했던 앵베르 주교, 교우촌 회장을 맡았던 민극가 성인, 갓등이에서 영세한 정의배(마르코) 성인 등이다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해 신자들이 흩어졌다가 1876년 선교사 입국이 시작되며 다시 만들어졌다. 1888년 공소에서 본당으로의 승격은 그 무렵 조선천주교회 분위기와 연관이 있다. 교세가 크게 확장되고 매년 1000명 이상씩 증가하던 때, 경기도 지역만을 전담할 선교사가 절실했다. 그래서 갓 입국해 어학 공부 중이던 신임 선교사 앙드레(Andre, 安學吉) 신부는 그해 7월 수원 갓등이로 내려갔다. 박해 시기 이래 유서 깊은 교우촌이며 선교사 입국 이후 지역 복음 전파의 중심지가 됐던 장소. 한강 이남 경기도 최초, 한국교회 네 번째 본당, 수원교구 지역 첫 본당인 왕림본당의 시작이었다. 당시 본당은 양평, 여주 , 이천을 제외한 현재의 수원교구 관할 지역 대부분을 관할했다. 교구 본당들의 ‘모본당’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초대 주임 앙드레 신부는 신자들을 쉽게 모으고 복음 전파의 중심지를 세우기 위해 성당 건립을 추진했다. 블랑 주교에게 보낸 연말 보고서를 보면 부임한 그해 가을에 공소 신자들은 모금을 하고 그들 손으로 직접 성당을 지었다. 1889년 200명 규모의 12칸짜리 초가 성당이 완공됐다. 왕림본당의 첫 번째 성당 건물이었다.

이후 본당은 인근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이 됐다. 설립 8년 만인 1896년 미리내본당이 분리 신설된 것을 시작으로 하우현(1900)·북수동(1923)·남양(1961)·정남(1975)·봉담(2001)본당을 분당했다.

또 초창기 지역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가능한 공소에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구해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 노력은 서당인 삼덕학교 설립으로 이어졌고 광성국민학교(현 광성초등학교)의 효시가 됐다.

그 과정에서 1892년 알릭스 신부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쓴 편지 내용이 눈길을 끈다. “짚신을 삼는 것이 유일한 생계 수단일 정도로 이들은 지독히 가난합니다. 그런 이들이 요즘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에 가는 노자를 마련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주교님을 뵙기 위함입니다. 이들의 순박한 믿음에 매일 감탄하고 있습니다.”


수원교구 ‘순례 사적지’ 선포 교령에서 이용훈 주교는 “선교의 요람으로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로 지역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며 “초대교회 공동체 모습을 실현하고, 외국 선교 사제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가난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서로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신앙 유산을 자녀들에게 전수했다”고 선포 이유를 밝혔다.

초기 제대, 제의, 십자가, 묵주, 기도서 등 500여 점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성당 옆 유물관에서는 왕림 신자들이 지녔던 신앙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구 사제관 건물에서는 100여 년 넘는 시간과 역사의 자취가 느껴진다. 올해 133주년을 맞는 본당 공동체는 항구하고 열정적인 선조들의 신앙 계승을 위한 성역화 사업을 준비 중이다.

박전동 신부는 “130여 년 전 갓등이 교우촌에 천주의 씨앗이 뿌려지고 신자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와 순교의 삶은 오직 하느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며 “설립 150주년, 200주년을 바라보며 그런 본당의 역사적 의의를 발전시키고 교구 사적지 1호 성당 지정에 맞춰 새 성당 건립 등 성역화 작업에 마음을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문의 031-227-6678 왕림본당 사무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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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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