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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의 순교자들](37) 그레고르 칼 슈테거 신부

9시간 걸어가 성사 베푼, 열정 가득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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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 칼 슈테거 신부

(Gregor Karl Steger)


▲ 그림=김형주 이멜다

 
▲출생: 1900년 12월 30일, 독일 레겐스부르크 트뢰베스

▲세례명: 칼

▲한국명: 전오범(全五範)

▲첫서원: 1922년 7월 11일

▲종신서원: 1925년 7월 12일

▲사제수품: 1926년 7월 11일

▲한국파견: 1930년 4월 21일

▲소임: 덕원본당 보좌, 영흥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4월 영흥성당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일/4일, 평양인민교화소  

 

▲ 영흥본당 첫 경당 앞에서 그레고르 슈테거 신부(왼쪽 수도복 입은 이)와 야누아리오 알베르트 수사가 어린 학생들과 함께 있다.

▲ 영흥본당 새 성당 앞에서 새 영세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앞줄 왼쪽이 슈테거 신부, 오른쪽은 칼리스토 히머 신부.
 
그레고르 칼 슈테거 신부는 산골이 아닌 신흥 도시 안에 성당을 세워 유급 전교회장을 통해 일반인을 선교하고, 가톨릭 교육으로 선교사업을 확장해나간 뛰어난 선교사였다.

“지금은 발전해 가는 도시에서 깨어 있는 공동체들을 건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시골 고향에 영향을 미친다. 산골짜기에서 도시로 신앙을 전하는 것은 더는 큰 효과와 의미가 없다.”

슈테거 신부의 이 말은 ‘근대화된 목표 지향적 선교 방법’의 배경을 이룬다. 그의 선교 대상은 도시민이거나 도시 인근 주민이었고,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관심을 많이 쏟았다.

“전교회장만이 선교사를 각 가정으로 인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으며, 교리 수업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순박한 한국인들은 의문이나 망설임이 있으면 전교회장을 찾아갑니다. 전교회장은 또 한국인의 관례와 풍습, 교우들의 생활, 가족과 친족 관계와 관련해 선교사에게 조언해 줍니다. 아울러 선교사는 어린이들을 모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학력을 갖춘 전교회장의 도움을 받을 때만 선교사는 어린이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슈테거 신부, 가족에게 보낸 1931년 10월 5일 편지 중에서)


선교는 가장 고귀한 일

그레고르 슈테거 신부는 1900년 12월 30일 독일 레겐스부르크 교구의 작은 마을 트뢰베스에서 아버지 요한과 어머니 안나 사이에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교사였다. 세례명은 칼(Karl). 그는 1913년 가족이 포헨슈트라우스에 있는 알텐슈타트로 이사하기 전까지 트뢰베스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1912년 레겐스부르크에서 김나지움 과정을 시작해 슈바이클베르크에서 계속 했으며, 파사우에서 마쳤다.

그는 1921년 6월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에 입회해 ‘그레고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후 1922년 7월 11일 첫서원을, 1925년 7월 12일 종신서원을 했다. 파사우교구 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1926년 7월 11일 사제품을 받았고, 그해 7월 25일 포헨슈트라우스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사제수품 후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의 부설학교에서 교사와 사감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1930년 4월 21일 한국 선교사로 파견됐다.

“이 세상에서 선교사,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것보다 더 이상적이고 고귀한 일은 없습니다. 저와 헤어진다고 울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룩한 구세주께 온당한 태도가 아닙니다”라는 글을 부모에게 남기고 독일을 떠난 그는 1930년 10월 30일 덕원에 도착, 덕원본당 보좌 신부로 선교지 첫 사목을 시작했다.

한국으로 오는 긴 여행기간 동안 말라리아에 걸린 그는 몸이 채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인데도 한국말 공부에 힘을 쏟는 등 열심이었다.

“첫날에는 더운 날씨에 6시간을 걸어 산골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엄격하게 유교를 따르다 최근 세례를 받은 신자 집에 가서 그의 부친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저녁에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습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일이 고역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바닥에 아무것도 깔지 않고도 잘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문턱을 찾아 거기에 걸터앉습니다. 문제는 잠자리입니다. 목침을 베개로 쓰라고 주더군요. 방바닥에 그냥 누워 자니 다른 번거로운 일이 없긴 했습니다. 자다가 발이 시리면 우의를 덮으면 됩니다.

다음날 우리는 다른 마을로 길을 떠났습니다. 40㎞를 9시간 동안 걸었습니다. 허름한 초가에서 미사를 올린 다음 교리를 배워둔 25살 청년에게 세례를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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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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