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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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작가 선종 특집] 고(故) 최인호 형을 생각하며

“지키지 못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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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호 형과 의형제를 맺은 것은 내가 장편소설 「인간시장」으로 유명해진 80년대 초였다.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세검정의 호텔방에서 반나절 동안 함께 심사를 하다말고 인호 형에게 말했다. “불과 이삼 년 전 나는 그 유명한 최인호를 사석에서 누차 비판했어요. 질투와 시샘이기도 했고 부러움에 대한 갈증이기도 했지요. 고백하지 않고는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술 한잔으로 맺은 의형제의 연

인호 형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내 앞에서 나를 비판했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처음 들었소. 그 정도니까 오늘의 김홍신이 된 거요.” 인호 형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형제’라고 했다. 따로 격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그 밤에 한 잔 술로 의형제의 연을 맺었고 지금껏 마음 기대며 살아왔다.

「인간시장」의 여주인공 이름이 ‘다혜’였고 형의 딸 이름도 ‘다혜’였다. 인호 형은 걸핏하면 내가 딸 이름을 훔쳐갔으니 보상하라고 했고 나는 형의 딸을 유명하게 해주었으니 보답하라고 우겼다. 장례식장에서 인호 형의 딸 다혜는 처음으로 “아저씨 때문에 제가 유명해졌어요”라고 했다. 인호 형이 꼭 들었어야 할 소리였건만. 소설 속의 다혜를 썩 괜찮은 인물로 그렸던 뜻을 형은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타박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인호 형은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며 위로 받고 싶어 걸핏하면 나를 불러냈다. 형의 마음속을 헤아릴 재주가 없고 술잔 기울인다고 해결할 수도 없었기에 성당에 다니자고 넌지시 말했다. “나를 설득해 봐라.” 인호 형은 말싸움으로 결코 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예외가 있었으니 이어령 선생님이었다. 이 선생님이 빠지면 그 자리를 차지해서 재미난 얘길 술술 풀어내는 것은 인호 형이었다.

보험 들었어? 영혼보험 들자!!

“생명보험, 교육보험, 자동차보험은 들었어?” “당연히 들어야 안심하고 살잖아.” “영혼보험 들었어?” “그런 게 있냐?” “형,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종교가 영혼보험이잖아. 성당 나가자. 정신보험 하나 들자.” “야, 그거 정말 말 된다.”

형이 성당에 다니겠다고 하자 막상 걱정이 생겼다. 성격이 어지간히 급한 사람이라 진득하니 6개월과정 교리공부를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서초동본당 주임신부님께 한달쯤 후 성모승천대축일에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신부님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서 바로 청담동본당 김수창 신부님께 떼를 썼더니 속성으로 교리공부를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했다.

여기에 또 문제가 생겼다. 인호 형은 혼자 다닐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편한 사람들과 함께 성당에 다니려면 서초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게 해야만 했다. 내가 사목회 부회장을 맡은 핑계로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김수창 신부님 얘기를 하며 “우리들이 청담동성당으로 가느냐, 인호 형을 서초동성당으로 데려오느냐”를 결정해 달라고 떼를 썼다.

당시 서초동본당에는 김형영 시인, 조창환 시인, 서울대 황경식 교수 등 형과 친한 이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신부님이 좌중의 뜻을 물었고 짜고 치는 판이었으니 어찌 허락하지 않고 배겼을까. 수녀님들의 지극한 배려로 형과 형수는 한 달 후에 세례를 받았다. 대부는 나보다 먼저 인호 형의 마음을 다독거린 김형영 시인이 맡았다. 그래서 인호 형은 그때부터 내 이름 대신 ‘부대부’라고 불렀다.

한참 전에 이어령 선생님께 세배하러 갔는데 인호 형과 내게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상상력을 잡으려면 컴퓨터로 글을 써야 한다’며 자판 두드리는 습관을 애써 강조했다. 우리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대문을 나서는 순간 어린애처럼 손가락을 걸고 “죽는 날까지 우리 둘은 손글씨를 쓰자”는 언약을 했다. 형도 약속을 지켰고 지금 나도 만년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인호 형에게 이런 우리 약속을 언제까지 지켜야하는지 물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키지 못한 약속, ‘인간 예수’ 그리고 ‘인간 붓다’

작년에 비행기가 여수공항에 착륙하고 나서 앞좌석에 있던 형과 나는 같은 비행기를 탄 걸 알게 되었다.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우리는 극적으로 만난 연인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승객들이 웃거나말거나 한참을 안고 있다가 손을 잡은 채 대합실까지 내려갔다. 형은 송광사 가는 길이요 나는 강연하러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또 끌어안았다. 형은 ‘걱정 마. 정말 걱정 마.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 내 볼에 깊게 뽀뽀를 하며 “사랑해”라고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형, 나도 사랑해. 기도할게.” 그날 강연장에서 그 이야기를 하자 여성들이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작가 최인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건강을 회복해서 좋은 글로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내 오른쪽 볼에 형의 입술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인호 형과 내가 약속한 것 중 또 하나 지키지 못한 것이 있다. 형은 ‘인간 예수’를 쓰고 나는 ‘인간 붓다’를 쓰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갑자기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우리는 아직은 좀 더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지내다 여기까지 온 것이리라.

플라톤은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필멸(必滅)의 인간이 불멸(不滅)을 추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자식을 낳는 것과 영원한 예술이나 지식 같은 걸 낳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시대의 걸출한 소설가 최인호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영혼은 청정한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에 살아 숨 쉰다. 그는 육신의 해방을 통해 영혼의 자유를 쟁취했다. 죽는 순간까지 작가로 죽고 싶어 했던 형은 작가답게 혼을 사르고 사랑을 남겼다. 나는 인호 형의 추모사를 쓸 수가 없다. 형은 결코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홍신(리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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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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